이전에 살던 아파트가 좋았던 점이 있다. 6년 동안 살면서 겪었던 수많은 단점들을 모두 상쇄시켰던 딱 한 가지 좋은 점, 터미널에서 가깝다. 시외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해야만 했던 내게 그보다 더 좋은 이유는 없었다.또 다른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는데 그건 이사를 하고나서야 깨달았다. 일주일에 한 번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날, 이사 후 처음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던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쓰레기가 쌓여있는 주변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쓰레기 무덤. 무심히 던져버리고 돌아서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
47.5%, 지난 2014년 6월 4일, 제 6회 지방선거 당시 30대가 기록한 투표율이다. 나 역시 30대였던 그 시절 큰아이를 데리고 투표소를 찾았던 기억이 난다.역대 지방선거 투표율 중 가장 높았던 기록은 68.4%, 1995년 첫 번째 지방선거 때였다. 이후로 투표율 60%를 넘는 지방선거는 없었다. 두 번째로 높은 투표율은 56.8%, 지난 2014년 6회 지방선거 때다. 전국단위 사전투표제가 처음 실시된 선거였다. 당시 연령별 투표율 중 가장 높은 투표율을 기록한 건 74.4%의 60대. 반대로 가장 낮은 투표율을 기록한
저녁을 먹고 미세먼지 수치를 확인한 다음 나갈 채비를 한다. 사촌형과 배드민턴을 한 번 해본 큰아이가 연습이 필요하다며 배드민턴 라켓을 꺼내든다. 축구 연습을 해야 한다며 축구공도 챙긴다. 이에 질세라 작은 아이는 킥보드를 타고 가겠다고 앞장선다.그날도 바리바리 싸들고 나간 날이었다. 아침부터 아이들로 북적이던 학교 운동장에는 다이어트 삼아 경보하는 아줌마 몇과 운동 마치고 나와 앉아있는 축구부원 몇 명, 팔짱 끼고 배회하는 여학생 둘 정도가 있었다. 축구부원들이야 그렇다 치고 저 여학생 둘은 왜 이 시간에 여기서 저러고 있을까?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김소월의 시구에 등장하는 진달래. 조선시대 강희안이 지은 양화소록(꽃과 나무의 특성을 정리한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 원예서)에는 진달래를 정오품의 꽃으로 적고 있다. 품격을 가진 꽃이라는 뜻이다.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강한 생명력을 가진 진달래는 우리나라 온대림식생을 대표하는 관목 가운데 하나다. 김소월의 시구에서처럼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고 있으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꽃. 우리 문화 속에 깊이 자리 잡은 민족 식물이라 할 만 하다. 특히
4년 전 이맘때, 나는 둘째를 가진 임산부였다. 꽃들이 온천지에 피어나고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 들썩거리던 그 봄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만나지 못했던 친구 한 녀석을 만나기로 했다. 결혼과 함께 다른 지역으로 떠나 살다가 당진에 정착하려고 내려왔다는 이야기만 먼저 들었다. 종종 만나는 다른 고향 친구와 더 친한 사이였기에, 셋이 함께 만나는 자리였다.어디가 맛있을까 고민하다 낙지요리를 파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중국산 낙지라 아쉽다며 낙지덮밥을 주문했다. 술을 즐기는 친구였기에 맥주 한 병을 시켰던 것도 같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버리지 말자 한 표”,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정당한 사람에게”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선거홍보 전단의 문구들이다. 1919년 3ㆍ1 운동이라는 강력한 저항을 경험한 일제는 지역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한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지방자치에 손을 댔다. 이름 하여 ‘조선인에 의한 지방자치 실현’을 전면에 내세우고 부ㆍ면 협의회, 도평의회 등의 자문기구를 새롭게 설치했다. 그리고 특별히 식민지 조선의 2등 국민에게도 선거권을 주고 의회에서 활동할 의원을 선거로 뽑도록 했다. 겉으로 보기엔 차별을 완화하고 권리를 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식민
우리는 오로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 약속했습니다.1997년 4월 영국, 서점과 신문 판매대에 2파운드짜리 작은 책자 하나가 깔렸다. 어떤 정책을, 언제까지, 어떻게 재정을 마련하고 시행할 것인지를 적은 노동당 토니 블레어의 매니페스토다. 선거 전에는 국민이 정당이나 정치인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고 당선 후에는 그들이 공약을 잘 지키고 있는가를 평가하고 검증하는 기준이 되는 매니페스토.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 5·31 지방선거 때 '한국 매니페스토 실천본부'가 발족하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교육이 최우선 과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지인들과 찾아간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이 막 나오고 있었다. 지난 몇날 며칠 잠 못 이룰 충격과 실망과 분노를 안겨주었던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이야기가 곁들여지는 중이었다. 저장되지 않은, 처음 보는 핸드폰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 건 그 순간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무음으로 눌러버리고 받지 않았을 텐데 하필 기다리던 택배가 있던 참이었다. 택배기사님이려니 생각하고 무심히 받았는데 다짜고짜 이름부터 확인한다.“이선우씨 맞습니까?”“네”“여기는 서울중앙지검입니다.”“네?!”경찰 친구도 있고, 경찰청의 도움을 받아
직장내 성추행 피해 사실을 힘겹게 이야기하는 한 여성 검사의 뉴스 토크를 보며 참을 수 없는 오심을 느꼈다. 성범죄를 단죄하고 죄 지은 자를 처벌해야 마땅한 사람들이 성추행을 일삼는 것도 모자라 동료 선후배라고 눈감아주다니, 그것도 남자에 한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지만 막상 진짜 그렇다고, 검사라는 직업을 가진 여성조차도 어쩌지 못하고 이렇게 살아왔다고, 여기도 그런데 거기는 괜찮냐고 물어보는 것 같아 맥이 빠지기도 했다.방송국에서도 그런 일은 알게 모르게 일어나고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아, 이걸 다행이라고 써야하
얼마 안 되는 서브작가 월급을 몇 달 아끼고 아껴 고스란히 운전면허학원에 바친 기억이 난다. 나중에 백수가 되면 시골에 내려가 배추장사라도 해야지 싶은 마음에 트럭 면허를 따겠다며 찾아갔던 것 같다. 반클러치를 밟았다 놓으면서 언덕을 올라가는 코스 연습은 지금도 생각날 만큼 떨렸지만 재미도 있었다. 마침 학원 근처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있었다. 코스 연습이 끝나고 이어진 도로 연수는 연구원 근처 가로수길에서 이루어졌다.연구원들이 출퇴근 하는 시간 외에는 오가는 차들이 많지 않은 길이었다. 떨리기도 무척이나 떨
잎새를 따 물고 돌아서 잔다 / 이토록 갈피 없이 흔들리는 옷자락 // 몇 발자국 안에서 그날 / 엷은 웃음살마저 번져도 // 그리운 이 지금은 너무 멀리 있다 / 어쩌면 오직 너 하나만을 위해 // 기운 피곤이 보랏빛 흥분이 되어 / 슬리는 저 능선 // 함부로 폈다 / 목놓아 진다 -사춘기 열병을 앓던 시절, 엉겅퀴라는 시를 읊조리고 다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함부로 폈다 목놓아 진다는 마지막 구절에서는 늘상 한숨을 삼키며 내 안의 슬픔이나 서러움 따위에 빠지곤 했다. 나의 모교인 당진
‘몰랐던 지식’을 알게 되는 기쁨보다 ‘몰랐던 나’를비로소 알게 된 깨달음이 더 크다.당진에 내려와 살기로 결정하면서 거의 포기했던 방송작가라는 직업. 혹시 하는 마음에 집은 터미널 근처에 얻었지만 돌쟁이 아이를 떼놓고 일터인 서울을 오갈 수 있을까 한숨이 깊었다. 당진에 내려온 지 석 달쯤 지났을까. 큰아이의 돌잔치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토록이나 갈망했던 프로그램에서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는데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혼자였다면 고민이라고는 1도 없이 시작했을 테지만 ‘지방에 사는’ ‘아기 엄마’가 해내기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전에 없던 유난을 떨고 살았다. 잦은 감기에 아토피까지 살짝 있었던 큰아이를 위해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것만큼은 유기농이나 친환경 인증을 받은 것들로 먹이려고 노력했다. 바르는 로션이며 목욕용품까지 화학성분이 없는 안전한 제품을 찾아대느라 핸드폰을 들고 살 지경이었다. ‘큰’ 문제없이 어느 정도 자라면서 그런 류의 ‘유난’은 서서히 시들해졌다. 그 사이 조금 더 건강한 체질을 가지고 태어난 둘째는 뭘 입어도, 뭘 먹어도 눈에 띄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열심히 찾아낸 좋다는 기저귀들 대부분이 발진을 동반했다. 딸
일하는 딸을 둔 엄마는 언제고 딸의 sos를 받아주셨다.엄마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면 그보다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이 또 있을까갑작스런 부고를 전해 들었다. 며칠 전 온 식구가 모여 담근 김장김치며 푹 고아 삶은 한우사골국이며 트렁크 가득 싣고 서울 큰댁에 올라가려던 부모님에게서 전해진 비보였다. 엄마의 형님이자 지난 세월 미운정 고운정 똘똘 뭉친 전우애로 함께 살아온 큰어머니의 부고.어린 시절 내가 본 큰어머니는 서울깍쟁이였다. 겉으론 괜히 미워하는 척 했지만 속으론 동경하기도 했던 것 같다. 대학 입학시험을 보겠다고 서울에 올라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