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김소월의 시구에 등장하는 진달래. 조선시대 강희안이 지은 양화소록(꽃과 나무의 특성을 정리한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 원예서)에는 진달래를 정오품의 꽃으로 적고 있다. 품격을 가진 꽃이라는 뜻이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강한 생명력을 가진 진달래는 우리나라 온대림식생을 대표하는 관목 가운데 하나다. 김소월의 시구에서처럼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고 있으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꽃. 우리 문화 속에 깊이 자리 잡은 민족 식물이라 할 만 하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음력 삼월삼짇날에 진달래 꽃잎으로 부쳐낸 화전을 안주 삼아 작년에 담근 두견주를 마셨다고 한다.

전국에 많은 진달래 명소가 있지만 그래도 진달래하면 면천이다. 일제강점기 우리 술 말살 정책에도, 쌀로 술을 못 빚게 금지하던 때에도 근근이 맥을 이어온 두견주가 있기 때문이다. 두견주는 천년이 훨씬 넘은 우리 진달래의 이야기가 담긴 술이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앞둔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 소개할만한 우리술을 급하게 살려냈다. 김포 문배주와 경주의 경주교동법주 그리고 당진 면천의 두견주다. 

진달래꽃을 넣어 만드는 술, 두견주. 두견새가 울다 토한 피가 진달래에 떨어졌다는 전설이 있어 진달래를 두견화라고도 부른다. 면천 두견주는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 장군에 얽힌 전설도 깃들어 있다. 복지겸 장군이 원인모를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게 되어 고향인 면천에 내려왔다. 아무리 약을 써도 차도가 보이지 않자 딸 영랑이 아미산에 올라 기도를 했고, 백일 만에 꿈에 신령이 나타났다. 찹쌀에 진달래꽃을 넣어 술을 빚되 반드시 안샘의 물을 쓰고 뜰에는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으면 아버지의 병이 나을 것이라 말했다. 영랑은 그 말대로 했고 복지겸은 병에서 나았다는 이야기다. 옛 면천 초등학교 교정엔 1,100년 수령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고 가까운 곳에는 안샘도 남아 있으니 더 그럴 듯 하다.

지난 달 초 면천의 진달래 축제장에 우연히 갔다가 적잖이 당황했다. 명색이 진달래 축제라는데 진달래는 정말 찾아보기 힘들었다. 철쭉 축제 같은 화려함을 기대했던 나의 잘못도 있겠지만 바람에 날아다니며 발길에 차이는 진달래 조화는 눈에 거슬렸다. 진달래가 다른 식물들과 달리 그늘을 좋아하는 음지식물이고 그래서 볕 좋은 정원에서 키우기 어렵다는 건 익히 알고 있지만 진달래 없는 진달래 축제는 내내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어딜 가나 똑같은 먹거리 골목 한 쪽에 진달래 화전 만드는 체험부스가 눈에 띄었지만 아이의 반응이 시큰둥해 그냥 지나쳤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은 면천두견주보존회에서 마련한 두견주 시음장. 두견주 한 잔을 받아들고 진달래꽃 다듬는 작업을 구경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 면천 두견주는 남북정상회담 만찬주로 이름을 올렸다. 그런 술이 당진에 있었어?! 당진에 살면서 뉴스를 통해 당진의 두견주에 대해 알게 된 사람들도 많다. 주문하려고 알아봤더니 5개월 쯤 뒤에나 가능하다더라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속에 앉아 진달래를 생각해본다.

백두산에서부터 한라산까지, 전국에 빠짐없이 피는 꽃. 화려하지도, 풍성하지도 않지만 봄햇살처럼 화사하고 소박한 꽃. 산천에 진달래는 지고 없지만 마음 부대끼는 봄날 내 마음속에는 내내 피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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