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투고> 김 민 채 / 당진국악예술협회원

 

 내 마음 한구석에 늘상 남아 있는 잊고 싶은 기억 하나. 나 어린 시절 허덕이던 우리 집의 가난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항상 남보다 더 맑고 밝게 웃고 더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왔다.

 잠은 남들 수면시간의 반도 자지 않으면서 일은 더 해낸다고, 또순이 또는 억순이라는 별명을 들으면서.

 내 삶의 역정이야 어찌되었건 그런 덕분에 하나뿐인 내 아들은 나를 항상 씩씩하고 용감하게 살아가는, 삶에 자신이 충만한 엄마로 인정하며 저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곱게 자라 왔다.

 말썽 한번 피우지 않고 곱고 착하게 자라니, 다른 이들이 마마보이 될까 싶다며 걱정을 할 정도로. 곱게 잘 자라 주어 항상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런 녀석이 어느새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식장에 앉아 졸업가를 들으며 난 자꾸 눈물이 났다. 오늘 여기에 오기까지 의젓하게 자라준 녀석에 대한 고마움과 사춘기를 혼자 힘겹게 끙끙 앓으면서도 잘 이겨내 준 녀석에게 향하는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에서였으리라.

 정이 많고 얘리얘리한 담임선생님. 은은한 나름의 향기를 지닌 분이었다. 그 향기 앞으로도 잃지 않는 훌륭한 교육자가 되셨으면 하며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드렸다.

옛적 어느 날인가, 깍두기를 담그기 위해 친구와 무우를 닦을 때의 일이다.

 “어휴, 무우 한 개가 이렇게 무거우니 죽 먹고는 들도 못하것네" 하였더니, “그게 뭐 무거워. 그래도 자식 안고는 절대 무겁다 소리 안할 겨" 하고 친구가 말을 받았다. 그랬다. 다 큰 녀석을 하루 종일 안고 다닐 때나 등에 업고 뛸 때도 힘들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얼마 전 고등학교 기숙사 입실원서를 제출하러 가다가 학교 앞의 수퍼엘 잠시 들렀었다. 음료수를 사드는 내게 입학 때문에 오셨느냐며 수퍼 아주머니가 말을 건네 왔다.

 “자식일은 마음대로 안 된다더니 참 속상하네여" 내 기대를 다 채워주지 못한다고 불만 섞인 대답을 하자,

 “무슨 그런 소리. 그래도 자식 낳아서 기뻤잖수. 그리고 또 그 자식 키우는 동안 행복하지 않았수. 그냥 바라만 봐 줘여" 하는 거였다.

 인사를 하고 나와 길을 걸으며 생각하니 자신이 부끄러웠다. 정말 중요한 걸 잊고 살아 왔구나.  내 입장에 서서, 가슴 아픈 일들을 아들에게는 겪게 하고 싶지 않다는 내 욕심에서 녀석에게 부담을 주고 있었구나. 아들의 꿈과 이상을 살펴 들여다 볼 생각은 못하고서, 내 대리만족을 위한 도구인양 마냥 다그치기만 하고 불평만 하고 있었구나. 그 동안 나는.

 때론, 내 마음을 몰라주는 녀석에게 서운하기도 하고 밉기까지 하여 소리소리 지르며 나무라기도 하였으니, 녀석의 상처는 보듬어줄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나 자신을 일깨워 준 아주머니는 멋지고 고마운 분이었다.

 오늘은 가슴이 휑하니 쓰리며 내 신체의 일부를 떼어놓고 돌아서는 듯 아프다.

 “소중한 천연 기념물 나의 아들"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을 위해 짐을 꾸려와 한 해 동안 생활할 수 있도록 방 정리를 해주고 돌아서는 길인 터라 가슴이 뭉클하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제 엄마 품을 떠나 홀로서기를 할 만큼 불쑥 자란 녀석이 대견하기만 하다.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모습으로 멋진 학창시절을 보내고서, 정말 행복한 미래가 두 팔 벌려 너를 인생의 승리자로 반겨주길 바랄 뿐이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의 천연기념물! 이 세상 어떤 것보다 너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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