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홍 석 표 / (사)내포문화연구원 원장


지난 17일 (사)내포문화연구원에서는 국내 제79차(본군 제13차) 역사탐방을 실시하여 당진읍 송산면 관내 문화유적 13개소를 답사했다.


오늘은 이번 답사에서 본 읍내리와 우두리 문화유적에 대한 소감을 피력하고자 한다. 필자는 당진 문화유적의 관리보존에 대하여 당진신문에서 누차 지적한 바 있다. 필자는 1972년 봄 우연히 읍내리 군청 뒷산에 올랐다가 고인돌을 발견하고 문헌에 나타난 아후산성과 당진읍성의 자취를 찾으려 여러 곳을 탐색했으나 확연치 않아 1979년 3월31일 충남대 박물관장 윤무병박사를 초청했다.

다음날 우두리·채운리·읍내리 답사결과 읍내리 전 경찰서 뒤쪽에 자취가 확연한 백제시대(B.C 18~A.D 660)에 축조된 포곡식(包谷式) 토성을 관아(官衙) 뒤에 있어서 명명된 아후산성(衙後山城)으로 고증 단정해주었다.


당진읍성은 면천읍성 다음해(1440년:세종22년) 완공된 군사적·행정적 기능을 갖는 것으로 그 자취는 서쪽과 동북쪽에 성돌 몇 개가 남아있었다. 1980년대 초 당진향토문화연구소 주최 제1차 역사탐방 때 최익준회장이 안내하여 당진읍성 서쪽 단독주택 부엌 뒤에 있는 성돌과 우물 3개소의 위치까지 증언해주었었다.

읍내리 고인돌은 아후산성 동북쪽에 있는데 지석(굄돌)이 없어 북방식 남방식도 아니어 의문시했으나, 윤무병관장은 굄돌 없는 변형식(개석식) 고인돌로 고증하였고, 당진읍성 축조당시 지석만 빼내어 사용한 것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을 부언하였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B.C 10세기~B.C 400년경) 거석(巨石)문화의 하나인 족장의 무덤이란 것(또는 제천의식 제단)이 고고학계의 정설이다. 당진읍 우두3리 거북산 위 태성(台城 : 백제시대 산성-1979년 필자 발견. 命名. 읍지에 당진현 태성리. 현재도 태성마을)도 우두3리에 있다.

이 읍내리 고인돌과 아후산성, 당진읍성에 대하여, 당진읍 읍내리·채운리 주민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지 의문이다. 아마 1000/1도 알지 못할 것이다. 2천년~3천년전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읍내리 당진군청 뒷산에 있다는 사실은 모르되, 매스컴과 문헌에 나오는 고창고인돌과 강화고인돌은 잘 알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내 것의 가치를 바로 알고 널리 알리기에 힘써야 한다.

합당한 홍보전략을 세워 15만 군민은 물론 200만 도민, 나아가서는 5,000만 국민 모두에게 알릴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해미읍성과 낙안읍성, 면천읍성은 매스컴을 통하여 잘 알고 있어도, 당진읍성은 보이지도 자취도 없어 읍내리 주민들도 잘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왜 당진읍성은 자취도 없이 모두 파괴되었는지, 누가 파괴했는지조차 아무도 모른다. 재삼 강조하거니와 행정당국은 당진의 유적지에 안내판을 다 세워서 당진군민 모두가 귀중한 선조들의 문화유산을 먼저 이해하여 잘 보존하고 복원하고 홍보해나갈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서는 우리 선조들이 구축한 귀중한 문화유산을 10개년, 20개년 장기계획을 세워 모두 복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문화민족, 문화국가로 공인받는 첩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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