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화 박사의 기획연재 2
❶ 갑오동학농민혁명보다 앞선 합덕농민운동

❶ 갑오동학농민혁명보다 앞선 합덕농민운동
❷ 합덕방죽에서 벌어진 합덕전투와 동학총의 의미
❸ 200여 년 전부터 전승된 합덕읍 점원리 상궁원 1반 마을 노신제
➍합덕방죽 가에 세워진 준설 기념비들
➎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합덕방죽 이야기


    이인화 지리학박사/충남문화재전문위원
    이인화 지리학박사/충남문화재전문위원

‘합덕농민운동’에 대한 이야기는 김추윤(전신한대학교사회과학대학장, 당진향토문화연구소 고문)이 농촌진흥청 도서자료실에서 일본어로 쓴 쿠마켄이치(久間健一)의 조사보고를 찾아 향토사학자 홍석표 선생에게 알려 이를 번역하여 내포문화 제호에 최초로 알린 바 있고, 당진문화원 민영근 원장이 2백만 원을 지원해 의정부시 호원동 호경석재에서 ‘합덕농민운동기념비’를 제작해 1997년 12월 30일 소들공원에 세웠다. 

본 필자가 2023년 합덕읍지를 쓰면서 ‘충청도관찰사조상계(忠淸道觀察使趙狀)’와 ‘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1894) 2월 15일, 4월 11일 기록들을 찾아 합덕농민운동의 실상을 재정리한다.


1894년 2월 6일 발발한 합덕농민항쟁은 전라도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한 이정규라는 세도가의 무단 탐학과 행악, 그리고 합덕지 수리계장으로서 지역 농민들의 생명수라 할 합덕지를 둘러싼 전횡으로 농민들과의 대립과 갈등이라 할 수 있다. 

이는 1930년 식민지 농정 관료인 쿠마켄이치의 조사보고와 덕산군수 김병완의 첩정에 의한 충청도관찰사 조병호의 상계인 ‘충청도관찰사조상계(忠淸道觀察使趙狀)’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이정규의 악행과 수세부과, 저수지 내 개간 등 사유화 횡포와 전횡에 대한 대책을 비밀리에 협의한 8백여 명의 농민들이 억울함을 홍주목에 등상하기 위해 대표를 선발하고 이정규의 악행을 낱낱이 기록한 ‘혈원록(血怨錄)’을 작성하였다. 

농민 8백여 명이 홍주목에 달려가 이정규의 전횡을 호소하고 돌아오다가 이정규가 자신들을 죽이라는 서신을 홍주목사에게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하여 그날 밤 봉기하여 이정규의 집을 포위하고 불 지르는 사건이 벌어졌다. 원인 제공자 이정규는 정배 처벌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농민대표 나성로와 이영탁은 동학농민군에 합류하였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합덕의 동학교도의 세력은 매우 강성하였으며, 1894년 10월 20일에는 합덕지 주변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져 다수의 농민군이 희생된 바 있다. 

지와 건립자 명단이 새겨져 있는 합덕농민운동기념비 후면. 이인화 박사가 학생들에게 합덕농민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모습. ⓒ이인화 박사 제공
지와 건립자 명단이 새겨져 있는 합덕농민운동기념비 후면. 이인화 박사가 학생들에게 합덕농민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모습. ⓒ이인화 박사 제공

1894년의 합덕농민항쟁은 고부민란과 발발 원인 등에 있어서 유사성을 지니는데 고부민란보다 11일 선행한다. 매우 생동적인 조사보고와 사료를 남긴 특이한 존재로서 10세기 후반 농민항쟁의 구체적 양상을 알려주는 사례이자 동학농민전쟁의 서곡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1894) 2월 15일 임술 기사 <의정부에서 민란의 원인이 된 충청 병사 이정규의 처벌과 고부민란을 처리할 것 등을 아뢰다> 도신의 계사에 “백성의 원망을 많이 초래하니 듣기에 해괴한 것이 있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잘 신칙하여 격려하지 않고 스스로 사람들의 원망을 불러일으켜 방화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하며 연제 아래에 있는 8동의 몇 천의 백성들이 이정규의 집과 그 관하의 12호를 불태워버렸는데 백성들이 모두 자기가 우두머리라고 하여 자세히 조사하여야 한다고 하고 전 병사 이정규를 도신의 계사로 인하여 잡아 왔으나 다른 죄수들과 뒤섞여 석방되어 다시 심문하여 정죄하게 하고, 난민은 주모자와 추종자를 조사하여 경중을 갈라 감처하니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1894) 4월 11일 정사 기사에도 <의정부에서 전 덕산 병사 이정규의 탐오죄를 처벌할 것을 청하다>에 “방금 충청 감사 조병호의 사계를 보니 덕산 군수 김병완의 첩정에서, ‘전 병사 이정규가 위세를 부린 여러 조항을 낱낱이 들었는데 막상 사안을 보니 과연 틀림이 없었고 각 해에 빼앗은 돈이 3만7,850냥이고... 그 밖에 쌀, 벼, 소금, 뇌물, 소, 말, 전답, 집, 산림, 시장, 재목, 짚, 어망, 선척 등 약탈한 물건과 사람을 죽이거나 상하게 하는 등 허다한 학정을 낱낱이 거론하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백성들이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는 일로 인하여 시작하여 갈수록 모여서 불을 지르고 소란을 일으키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그 실정은 엄하게 징계해야 마땅하고 하였다.

전 병사 이정규는 시골에서 함부로 위세를 부리고 평민들을 못살게 굴면서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는데 사람을 때려 크게 상한 것은 거의 이웃 고을에까지 미쳤고 온갖 약탈행위는 낱낱이 거론할 수 없으며 백성들의 호소와 사안이 부절을 합한 듯 꼭 들어 맞다며 탐욕스럽고 잔인한 행동이 온 경내의 백성들로 하여금 안도하지 못하게 하고 고통에 핍박을 당하거나 과격해져 소요를 일으켰음을 알 수 있고 변원에 정배하였다.

소들공원에 ‘합덕농민운동기념비 건립취지문’에는 “합덕농민운동은 고종 30년(1893) 음력 섣달 그믐날 나성로, 이영탁을 중심으로 하여 합덕지방의 합덕 옥금 신석 대합덕 점원 도리 등 합덕방죽 몽리지역 6개 마을 주민 약 천명이 당시 연제 수리계장이던 전 전라도병사 이정규의 착취와 탄압에 항거하여 봉기한 대규모 농민운동이다. 우리 근대사의 분기점을 이룬 동학농민운동(1894)보다 먼저 일어난 합덕농민운동은 농민들이 지배계급인 양반중심의 봉건적 체제와 불의에 저항한 우리 고장의 향토사에 차연히 빛나는 의거이다. 민본, 민생, 민주이념에 입각하여 조선말 신분적 압제에 항거한 선조들의 의로운 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당진문화원은 향토사학자와 뜻있는 지역주민들의 정성을 모아 분노의 함성이 메아리쳤던 그 현장에 기념비를 세운다. 1997년 12월 30일 학남 홍석표 짓고 남송 최규선 쓰다”라고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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