❶ 합덕방죽의 기원에 대하여
❷ 합덕방죽의 옛 모습에 대하여
❸ 합덕에 현덕왕후 권씨 생가지가 있다
❹ 합덕 주민과 아라비아인들이 교역했다

이인화 지리학박사/한국도량형박물관 설립자
이인화 지리학박사/한국도량형박물관 설립자

현덕왕후(顯德王后) 생가지가 당진시 합덕읍 궁리에 있다. 현재까지 집터 논 위 농가 앞에 주초돌이 죽 늘어 놓아져 있다. 이 집터에서 현덕왕후 권씨가 1418년(태종 18년) 3월 12일 본관이 안동인 화산부원군 권전의 딸로 태어났다.

세종실록 93권, 세종 23년(1441) 9월 21일 갑인 3번째 기사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빈의 지문과 명 현덕빈을 옛 안산읍 와리산에 장사지냈다에 지문에 이르기를, “빈의 성은 권씨로서, 부의 휘는 전이니, 지금 자헌대부중추원사다. 어머니 최씨는 휘 최용의 딸이니, 영락 무술 3월 임신에 빈을 홍주 합덕현의 사제(합덕읍 궁리)에서 낳았다. 빈은 나면서 정숙하고 아름다워 외화가 보통과 다르고 말과 행실이 예절에 합하였다. 선덕 신해(1431년)에 뽑혀서 세자궁에 들어와 승휘(세자궁에 딸린 종4품 내명부 나인)가 되었고, 얼마 아니 되어 양원(종3품 세자의 후궁 중 서열 2위)으로 승격되었다. 정통 정사(1437년) 2월에 빈 봉씨가 부덕함으로 빈에 책봉되었다. 공경히 양궁을 받들매 화한 마음으로 기쁘게 받들고, 좌우의 잉시들에게는 항상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삼가고 화합하는 미풍을 조성하였다. 신유년(1441) 7월 23일 정사에 몸을 풀어서 원손이 탄생되니, 양궁께서 매우 기뻐하시고, 온 나라 신민들이 서로 축하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장차 원손의 탄생한 예를 거행하려 하시었는데, 이튿날 무오에 갑자기 병이 나시어 동궁 자선당에서 운명하셨으니, 춘추가 스물넷이다. 9월 초7일에 시호를 현덕이라 하고, 예를 갖추어 안산군의 고읍 산에 장사하였다”하고, 명에 이르기를 “부드럽고 지혜로운 덕과 아름답고 고운 용모가 양궁에게 사랑을 받아, 그 책봉하심을 받았고, 의식대로 빈의 법도를 닦으시어 미덥게도 원량의 짝이 되셨도다”하였다.

현덕왕후 권씨 영정. ⓒ이인화 박사 제공
현덕왕후 권씨 영정. ⓒ이인화 박사 제공

이처럼 현덕왕후 권 씨는 문종의 추존 왕후이자, 경혜공주와 단종의 어머니이며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큰며느리다. 세자의 첫 번째 세자빈인 휘빈 김씨가 폐위되고 순빈 봉씨가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가 세자와 순빈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아 권씨, 정씨, 홍씨 3명을 승휘(세자의 후궁)로 들일 때 들어가 두 딸을 낳고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세자빈으로서 가례도 치르지 않고, 세자빈으로 봉한다는 교지만 받았다. 1441년(세종 23년) 7월 23일에 세자 문종의 아버지 세종의 기대대로 경복궁 자선당에서 원손을 낳았다. 세종은 크게 기뻐하며 대사면령을 내렸다.

현덕왕후 권씨는 단종을 낳은 지 한 달 후에 산욕열로 1441년 11월 18일 향년 23세로 사망하였다. 단종은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가 직접 자신의 젖을 물려 길렀고 그 동복 누나인 경혜공주도 돌보았다. 현덕왕후 권씨가 죽은 후 문종은 더 이상 정실 부인을 들이지 않았다.

시호는 현덕빈으로 남편 문종이 즉위하자 현덕왕후로 추존됐고 아들 단종이 즉위하자 인효순혜라는 존호가 더해져 정식 시호는 인효순혜현덕왕후로 안산 소릉에 장사지냈으며 후에 문종과 함께 동구릉 내 현릉에 동원이강릉 형식으로 합장되었다.

현덕왕후의 어머니이자 단종의 외할머니인 최씨와 남동생 권자신은 성삼문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을 벌이다 발각돼 1456년(세조 2년) 처형됐다. 단종도 일개 왕자 신분인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고, 이 여파로 아버지 권전과 현덕왕후는 각각 서인으로 격하되었으며, 현덕왕후의 신위는 종묘에서 끌어내어 내쳐졌고, 성종 때는 현덕왕후가 세자빈으로 책봉될 때 받은 교명 등이 불살라지기도 하였다.

심준근 댁 앞에 있는 현덕왕후 권씨 생가지 주춧돌. ⓒ이인화 박사 제공
심준근 댁 앞에 있는 현덕왕후 권씨 생가지 주춧돌. ⓒ이인화 박사 제공
헌릉 현덕왕후 능 모습. ⓒ이인화 박사 제공
헌릉 현덕왕후 능 모습. ⓒ이인화 박사 제공

세조가 형인 문종의 무덤을 파헤쳐서 현덕왕후의 관을 꺼낸 뒤 시신을 화장해서 뼛가루를 바닷가에 버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이는 거짓이다. 연려실기술 등 야사에 따르면 단종 사후 세조가 꿈을 꿨는데, 왕자 시절에 사망한 형수 현덕왕후의 혼령이 시동생 세조에게 분노하면서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들을 죽이겠다”고 저주를 퍼부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가 사망한 날은 1457년(세조 3년) 9월 2일로 단종이 사망한 1457년(세조 3년) 10월 21일 보다 의경세자가 먼저 사망하였다. 

성종 때 남효온이 현덕왕후 복권을 상소하였으나 성종은 불허하였다. 중종 때 왕후가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면 폐서인하지 않는 법인데 이미 죽은 뒤의 일로 연좌한 것은 지나치다는 이유와 문종이 혼자 종묘에 모셔져 있으니 신하로서 보기 민망하다는 이유로, 1513년(중종 8년) 왕후로 다시 복위되어 동원이강릉 형태로 동구릉 경내에 있는 현릉에 다시 안장되었다.

아들의 비극적인 죽음과 이후 벌어진 세조의 참혹한 만행 때문에 관련된 야사가 많다. 유순정이 현덕왕후의 복위를 앞장서서 반대하였는데, 어느 날 권민수가 숙직을 서다가 꿈을 꿨다. 현덕왕후의 외손자인 해평부원군 정미수와 유순정이 크게 싸우는데, 유순정이 궁색해 하는 꿈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유순정이 병사하니 사람들이 현덕왕후의 복위를 반대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 다른 야사에는 현덕왕후의 관이 바닷가에 버려졌는데, 한 승려가 바닷가에서 여자의 통곡 소리를 들었다. 놀라 나와 보니 여자는 없고 빈 관만 있었다. 

승려는 괴이쩍게 여겨 관을 풀로 덮었는데, 시간이 흐르자 바닷가 언덕 중 하나가 되어 아무도 위치를 알지 못하였다. 중종 대에 이르러 현덕왕후가 복위되어 관을 찾으려고 언덕을 팠는데, 아무리 파도 관을 찾을 수 없었다. 하루는 감역관이 꿈을 꿨는데, 현덕왕후가 시녀들을 대동하고 나타나서 “너희가 고생이 많다”고 위로하였다. 감역관이 꿈에서 깬 뒤 땅을 파자 바로 시신 없는 빈 관만 나왔다고 한다.

이처럼 합덕읍 궁리에서 출생한 현덕왕후는 23세에 사망하여 자식과 가족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등 애환 많은 삶을 여인으로 단종의 폐위와 맞물려 합덕현이 폐현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어머니 최씨와 남동생 권자신이 역모에 가담하여 고려말부터 159년간 이어온 현이 폐현되어 홍주 합북면 합남면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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