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꽃밭 기획연재-2
'장갑'을 읽고, 글/에우게니 M. 라쵸프  
번역/ 배은경, 출판/한림출판사

ⓒ삽화 방민정
ⓒ삽화 방민정

[그림책꽃밭 이선우] 그림책 <장갑>을 읽고 나니 ‘똑닥’이 생각났다. 똑닥은 아이가 어려서부터 다니는 소아과병원 예약 앱이다. 

큰아이는 문턱이 닳도록 병원을 들락거렸다. 병원 갈 때마다 통원비를 주는 보험을 들었을 정도다. 아이가 자라면서 병원 대기 지옥에서는 웬만큼 해방됐지만 그사이 등장한 똑닥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세상 편해졌네! 처음엔 아무렇지 않게 이 말을 내뱉었다. 

정말 오랜만에 병원 갈 일이 생겨 똑닥에 접속하니 업데이트로 넘어갔다. 잠깐 사이에 다시 접속해보니 오전 진료 마감. 점심 지나 눈 깜짝할 사이 오후 예약도 놓쳤다. 병원에 읍소라도 해볼까 전화를 했더니 6시에 야간진료 예약이 열린다고 ‘귀한’ 정보를 알려준다. 

6시 땡과 동시에 초단위로 손가락을 놀렸지만 또다시 실패. 부글거리는 마음에 다시 전화를 거니 간호사는 급하면 응급실에 가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며칠 뒤 똑닥에 대해 성토하던 어느 자리에서 나는 기가 막힌 말을 들었다. “그거 유료서비스 결제해야 예약돼요.” 

숲에 떨어진 장갑 한 짝에서 시작된 이야기 <장갑>. 보송보송한 털에 가죽으로 마감된 이 장갑을 맨 처음 발견한 건 작은 쥐다. 장갑 아래 나무를 세우고 사다리를 놓으며 집 꼴을 갖추고 나니 개구리가 들어가고 토끼도 들어간다. 뒤이어 자기도 넣어달라는 여우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긴장감이 고조된다. 천적인데! 걱정하며 다음 장을 넘기니 평화가 이어진다. 

여우와 함께인 장갑 속 동물들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뽐내는 늑대, 무시무시한 엄니를 가진 멧돼지, 덩치가 큰 곰에게까지 곁을 내준다. 굴뚝이 생기고 창문이 생기고 딸랑딸랑 종까지 달아놓으니 사람 사는 풍경이 이럴까 싶다. 

서로 쫓고 쫓기는 동물들이 옴짝달싹 못 할 정도로 붙어 있는데도 표정은 편안해 보인다. 먼저 발견했다고 주인행세를 하지도 않고 비좁다고 불만을 내비치지도 않는다. 주인이 돌아와 장갑을 찾는 마지막 장면은 평화와 행복이 순식간에 흩어지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장갑 속에 남은 온기 덕분에 따뜻하게 느껴진다.

잠시나마 장갑은 그들에게 공공재였다. 먼저 발견했다고 텃세를 부리지도, 덩치가 크거나 힘이 세다고 과시하지도 않았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와 평안이 주어졌다. 조금이라도 불평등이 생길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그 어떤 것이든 공공의 영역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전국의 많은 개인병원이 도입한 예약시스템 똑닥을 곱씹을수록 불편한 이유다. 

무료로 시작했지만 어느 날 은근슬쩍 적자니 유지비니 언급하면서 월 1100원을 내야 하는 유료서비스로 전환했다. 독과점과 다름없는 현시점에서 월 1100원으로 끝날까? 돈이 얼마가 되든 한 번 길들은 ‘편의’를 떨쳐내긴 쉽지 않다. 

하물며 놀이동산 패스트트랙 티켓처럼 더 큰 돈을 내고 진료 기회를 선점할 수 있다면? 길게는 몇 년 걸리는 메이저병원 접수 대기도 돈으로 살 수 있게 된다면? 좋은 아이디어를 낸 사기업 입장에서야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이 서비스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그래서 진료 자체를 못 보는 피해자가 생긴다면? 병원 대기 지옥에서 해방시켜 준 고마운 서비스지만 누구에게나 똑같이 고마울 수는 없다는 게 함정이다.      

얼마 전 부모가 가진 능력과 상관없이 모든 아이가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마을교육활동가가 되었다는 분을 만난 적이 있다. 부자든 가난하든 상관없이 누구나 평등하고 행복하게 사는, 그가 꿈꾼다는 세상은 <장갑> 속에 있었다. 

나 혼자만 따뜻하게 지내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고 배려하며 함께 행복한 세상. 전화기에 깔린 똑닥 앱을 차마 지워버리지 못하는 지질한 현실을 딛고 선 나도, 감히 그런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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