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헌 숭실대학교 철학과 초빙교수

김문헌 숭실대학교 철학과 초빙교수,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김문헌 숭실대학교 철학과 초빙교수,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당진신문=김문헌 교수]

정치란 인간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장치, 그 장치의 규칙을 만들고 보존 및 수정하는 행위다. 인간이 삶을 살다보면 서로의 이익에 따라서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그로 인해 사회공동체가 와해, 붕괴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두고 ‘정치적 동물’이라고 말했던 것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의 이익 관심의 갈등을 조정하는 것이 정치라면, 거기에 할당되는 몫을 어떻게 배분할 것이냐가 관건이다. 그래서 정치란 각각의 사람들이 자신의 고유한 몫을 갖기 위한 이성적·합리적 장치이다. 이에 민중의 평등한 몫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합의되는 법(입법부), 법의 공정한 적용(사법부), 법의 공적 실현과 집행(행정부)이 독립적이면서 상호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중요한 정치적 장치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정치가 민중 사이의 갈등 해소를 위해 끊임없이 촉구하는 정치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게다가 지금 민주주의의 문제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개념을 빌려서 말한다면, ‘민중의 부재’상태를 가볍게 생각하거나 민중의 존재를 망각한다는 데에 있다. 민중의 인격이 정치체의 총합으로서 기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권력자의 인식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민중이 스스로 정치체의 중심으로서의 인격적 주체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중의 시각, 촉각, 후각, 미각, 청각을 지배하는 정치 권력과 미디어 권력, 자본 권력은 민중을 더욱 우매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서 민중은 정치적 현상을 ‘사태 그 자체’로 보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법이 민중의 합의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인가, 법이 공공의 이익에 기반을 둘 수 있도록 결정된 것인가, 법이 그에 따라 민중을 위해서 집행되고 있는가, 라는 자문을 해보는 이유는 민중정치의 불균형이 초래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법의 보편성과 견제에 의한 절제와 자기 성찰적 성격이 결여되면, 법이 폭력이 되고 만다(법의 폭력적 힘). 민중이 자신의 자연상태에서 갖고 있던 자유, 평등 및 집행권을 사회에 위임하고 권력이 입법부에 의해서 행사되도록 하는 것도 자신의 복지나 재산이 더 안전하게 보장받기 위함이다.

이때 사법부의 재판관은 공평무사해야 하고, 합의된 법에 따라서 법률을 집행해야 한다.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는 ‘통치가 힘과 폭행의 산물이자, 야수의 세계 법칙’과 다름이 없다는 식으로 비판한 것도 이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정치사회는 다수파에 의해서 움직여야 하고 정치체와 공동사회 나아가 국가는 시민의 합의와 동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만큼 민중정치에서 합의와 동의가 중요한 정치적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공동사회의 힘과 법은 “국민의 평화와 안전 및 복지 이외의 다른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라도 행사되어서는 안 된다”(J. Locke의 통치론).
  민주사회의 피로가 많아질수록 장치로서의 민주주의는 ‘욕망을 나타내는 이미지들의 무정부상태’(J. Lacan, 에크리)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다. 욕망적 이미지들은 민중을 지배하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아감벤에 의하면, 장치는 ‘권력 관계의 상징어이자 전략적 기능을 가진 형성체/형성물’을 가리킨다. 민주주의가 단순한 수단적 장치로 전락할 위험이 여기에 있다. 정치권력 집단은 지배로서의 장치를 강화하기 위해서 또 다른 전략으로서의 장치인 이미지 권력을 활용한다. 욕망에 사로잡힌 민중은 대타자의 욕망을 이미지 장치로 불러일으키는 정치체에 감쪽같이 속아서 민중 정치의 주체로서 자신의 권력을 고스란히 양도하고 심지어 탈취 당한다. 이로써 대부분 민중들은 경험 이전에 주어진 기호에 의해서 자신의 (정치적) 무의식이 억압된다. 따라서 민중은 정치체의 본질과 자신의 올바른 정치 판단을 위해서 그 기표의 원본적인 데까지 소급, 환원하여 본질을 직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난한 해석학적 수행능력을 갖춰야 한다.

나아가 민중정치가 제대로 구현되려면 민중이 자기 몫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몫을 갖는다, 나눈다는 것은 함께 산다는 것으로 정의 내리고 있다. 그것은 존재적인 함께 나눔을 의미한다. 아감벤은 이를 근거로 “나눠지는 것은 존재한다는 사실,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이로 인해 나눔, ‘이 근원적인 함께-지각함이 정치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나눔과 몫의 근원적인 쏠림이 현 정치의 문제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지금의 특수한 정치가에 대한 비난보다는 정치현상 자체 혹은 정치적인 것 일반에 대한 엄밀한 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 민중은 선거철만 되면 권력의 낙수효과를 기대하면서 투표를 한다. 그것을 통해 단순히 수동으로 민중 자신의 민중 몫으로서의 권력의 배분과 권력의 아르케로서의 민중을 염두에 둔 나눔이 현실화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정치권력은 씨알에게서 나온다.’ 그것이 진정한 권력의 아르케에 대한 성찰적 인식이다. 민중에게서 민중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나온다. 21세기에 맹자가 말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논하자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임금은 가장 가벼운 존재다”라는 말과 여민동락, 곧 “백성과 더불어 같이 즐기는 것”이 진정 군주의 즐거움이라는 것을 정치가들은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개체로서의 민을 고려, 배려하지 않는 정치는 진정한 민중정치라 할 수 없다. 이러한 정치적 이상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쟁취하기 위한 처절한 표출이 정치적 시위인 셈이다. 정치권력은 그러한 정당성을 짓밟으며 극악무도한 민중으로 몰아 부치고 감히 사법권을 행사하지 않는가. 민중이 부여한 법을 적용할 권리로 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악’의 개념을 매우 폭넓게 보았다. 그들은 ‘카콘’을 ‘올바르지 않은 일을 당하는 것’, ‘화를 입는 것’, ‘상대적인 불행’으로까지 확대하여 해석하였다. 그리스에서 본 악의 정서를 오늘날의 민중에 대한 정치에다 대입한다는 것은 무리는 아닐 것이다.

존 로크와 아나키스트들, 그리고 함석헌 등은 한결같이 인간의 자연상태에서의 절대 ‘자유’를 부르짖었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민중 각자의 몫의 불평등 현상이 초래된다면, 그러한 정부와 국가주의를 거부해야 한다. 그와 같은 정부, 국가, 정치체, 통치기구를 민중이 동의, 합의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민중의 합의체의 최소한의 인위적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최대는 씨알들의 자기 생각, 자기 깨달음, 자기 행동의 자발적 대동모임, 협화공동체의 자연장치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정치가들이 들어선 자리는 부담스런 장소이고, 그들의 ‘민중을 위한다는 정치’(정말 그런가, 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는 무거운 짐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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