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신문=이선우 작가] 자주 보는 유튜브 방송이 있다. 아나운서 부부의 책 소개가 좋아 짬이 날 때 몰아서 보곤 한다. 그 중 아이와 소풍 나가서 있었던 에피소드 편을 보는데 ‘유아차’라는 자막이 눈에 띄었다. 남편이 유아차를 밀고 언덕(?)을 오르는 장면이었다. 세상에나, 유아차라니!

어미 모 자가 들어간 유모차. 엄마에게만 육아의 부담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여 다른 단어로 대체된 것이 유아차다. 친모 대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젖어미 유모(乳母)가 아이를 돌볼 때 쓰는 수레라는 뜻을 담고 일본에서 건너온 번역어일 뿐 차별적 언어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주장도 있기는 하다. 어원 자체가 성차별과 관계없고 그러니 성차별적 언어로 볼 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 단어가 주는 어감을 불편하게 느끼기 시작했다는 점이 반가웠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여성을 비하하는 의미가 담긴 말들을 사용하고 있다. 알면서도, 불편하면서도 달리 대체할만한 말이 없어 쓰는 경우도 있고 오랜 세월 그렇게 써온 말이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도 한다. 가족 사이에 서로를 지칭하는 호칭에서 그 예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사린아. 오늘 제사래, 내가 빨리 가서 도와줄게. 먼저 하고 있어. 응?”
“구영아. 나는 할아버지 얼굴도 본 적 없거든. 내가 너를 돕는 거라고 생각되지 않니?”

인스타그램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연재되었던 웹툰에 나오는 대사의 일부다. 작품의 이름은 ‘며느라기’.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웹툰버전이라고나 할까. 작가가 그려내는 그림은 귀엽고 따뜻하다. 하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이내 숨이 막힌다. 아내를 이해하면서도 부모님께 거역할 용기는 없는 남편. 굳이 며느리를 부려먹을 생각은 없지만 당신이 그렇게 살았듯 집안 제사 때는 여자가 일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시어머니. 지극히 평범한 일상 곳곳에 널려있는 불합리와 불평등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누구하나 나쁜 사람은 없지만 그래서 더 진저리쳐지는 이야기다.

결혼한 아들의 아내를 이르는 말인 며느리는 '기생한다'는 뜻의 '며늘'과 '아이'가 합쳐진 말이다. '내 아들에 딸려 기생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오빠나 남동생의 아내를 가리키는 '올케'는 '오라비의 계집'에서 유래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며느리와 올케의 어원에 대해서는 학설이 엇갈린다고 하는데 줄줄이 딸려 나오는 다른 호칭들을 생각하면 크게 틀린 것 같지는 않다. 남편의 부모님을 ‘아버님’, ‘어머님’ 이라 부르지만 남편은 ‘장인어른’, ‘장모님’이라 부른다. 여성은 결혼을 통해 새로운 부모님이 생기지만 남성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 호칭에 담겨있다.

결혼하지 않은 남편의 동생을 ‘도련님’이라 부르고, 결혼한 경우에는 ‘서방님’이라 부른다. 결혼초 남편 누나의 남편은 뭐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그 역시 ‘서방님’이라 불러야 한다는 친절한 안내를 확인했지만 입을 떼기는 쉽지 않았다. 내 서방도 아닌 이들을 서방님이라고 불러야 한다니, 불편하기 짝이 없다. 여자는 ‘시댁’에 가지만 남자는 ‘처가’에 가고 남편의 여형제는 ‘아가씨’라 부르지만 여자의 여형제는 ‘처제’라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호칭들 속에 여성에 대한 존중은 없다. 여성은 그저 남성에 기생하거나 남성에 종속되는 객체로 그려져 있을 뿐이다. 남편이 먼저 죽는다고 해서 그 삶을 규정하는 이름이 달라지진 않는다. 흔히 쓰는 미망인이라는 호칭은 남편과 함께 죽어야 할 것을, 아직 죽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란 뜻이 담겨있다. 남존여비, 남녀차별이 당연시되던 남성 중심의 세계관이 그대로 담겨있는 호칭들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듯 호칭은 존재를 규정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호칭하는 가가 중요하다. ‘여류 작가’가 아닌 ‘작가’, ‘여성노동자’가 아닌 ‘노동자’, ‘처녀작’이 아닌 ‘첫 작품’이어야 한다. 어떻게 부르는가가 그 존재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면 행동을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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