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3.1혁명 1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는 전국에 걸쳐 수많은 독립만세운동이 조명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을 바탕으로 한 독립만세운동에 국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가급적 3.1혁명을 은폐 축소하고자 했던 일제가 의도적으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증언을 통한 발굴도 생존자의 부재로 인해 한계를 극복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조선 전역에서 전개된 바 있는 독립만세운동을 감안하여,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만세운동 발굴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버그내장터로 불렸던 합덕전통시장.
버그내장터로 불렸던 합덕전통시장.

합덕 버그내장터 독립만세운동은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진 바 없는 만세운동이다. 버그내장터 독립만세운동에 대해서는 합덕 버그내장터에서 장꾼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려다 합덕면장이 제지하여 해산하였다는 정도였다. 그렇지만 당시 상황을 보도한 매일신보를 보면 합덕 버그내장터 독립만세운동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간단하게 정리되지는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당진 버그내장에서 소요

당진군 합덕면 범근시에서 월 이일 다슈군즁이 만세를 고창하고 소요를 시작으로 범근시 경찰주재소 순사와 합덕면장 김철호가 진력 해산식히고 당진군슈와 경찰서장이 출동ᄒᆞ야 엄즁경계하엿더라.
 
이상의 매일신보 보도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합덕 버그내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진 것은 4월2일이고, 다수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시작했지만 합덕면장 김철호가 제지하여 해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합덕 버그내장터 독립만세운동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한 독립만세운동이 아니라 버그내장을 이용하여 다수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고 만세시위를 전개한 버그내장터 독립만세운동이었다고 할 것이다.

다음 문제는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한 날을 특정하는 문제이다. 매일신보 4월11일, 14일 보도에는 "당진군 합덕 범천 양면에서는 금월 2일부터 시위운동을 시작하였다“는 사실과 ”4월2일 버그내장터에서 소요가 있었다“고 보도하였다. 현재 버그내장은 1일과 6일에 열리는 5일장이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의 버그내장이 2일과 7일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장날을 이용해 열렸고, 실제로 천도교에서는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도록 지침까지 내렸던 점을 고려할 때, 주동자들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을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이해할만한 일이다. 그러므로 합덕 버그내장터 독립만세운동은 장날을 이용하여 조직적으로 준비한 독립만세운동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버그내장터 독립만세운동은 누구에 의해서 주도되었을까 하는 점이 남는다. 합덕 버그내장터 독립만세운동은 체포자가 없어서인지 기록이 전무한 상태이다. 따라서 버그내장터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를 특정한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버그내장터를 생활권으로 하는 합덕, 범천, 신평, 순성면민들에 의해 주도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그중에서도 합덕의 젊은 사회주의 세력과 범천의 국체보상운동을 주도했던 세력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합덕지역은 일찍이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된 지역이다. 3.1혁명이 1917년 러시아혁명의 성공으로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에 합덕성당에서 1908년 개교한 매괴학교의 존재는 합덕지역에서 사회주의 세력 형성에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1919년 이전부터 합덕지역에는 사회주의자들이 조직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고, 합덕 버그내장터 독립만세운동에 개입했을 개연성이 높다.

또한 1907년 전개되었던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던 범천면민들의 존재이다. 범천면민들이 국채보상운동에 마을 단위로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았을 때, 거족적으로 전개된 3.1혁명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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