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대호지면 조금리 전경
대호지면 조금리 전경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주동자 중에는 대호지면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면장과 면서기들이 있었다. 면장이던 이인정과 면서기였던 강태완, 김동운, 민재봉 등이 그들이다.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이 대호지면민 다수가 참여하여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던 것은 이들 면서기들의 적극적인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따라서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은 일제의 말단 통치기구였던 면사무소 종사자들이 주도했던 운동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 면장과 면서기는 대체로 일제의 통치에 협조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면장과 면서기들은 3.1혁명 과정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저지하거나 탄압하는데 앞장섰다. 일례로 합덕 버그내 장터에서는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을 때 합덕면장 김철호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대규모 시위로 확대되는 것을 막아낸 사례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3.1혁명 중 독립만세운동이 있으면 면사무소는 일제를 상징하는 존재로 보아 공격 대상이 되었고, 송악면에서는 송악면사무소를 방화하려다 사전에 발각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대호지면·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은 흔치 않았던 일로 파급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 중에는 대호지면사무소에 소사로 근무하던 송재만이란 인물이 있었다. 송재만은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인 행동대장을 맡아 활약하였다. 송재만은 1891년 생으로 3.1혁명 당시 29세의 청년이었다. 송재만은 서산군 이북면 내리(현 태안군 원북면)에서 태어나 천안군 천안읍 읍내리로 이주하였다가 대호지면 조금리로 이사하여 살고 있었다. 1919년 당시 송재만의 직업은 용인(傭人)으로 대호지면의 소사였다. 소사는 면사무소에 근무하면서 면사무소의 잡무를 맡아 처리하는 직위로 면서기 보다는 직위가 낮은 용인이었다. 당시 대호지면에는 면장인 이인정과 강태원, 김동운, 민재봉, 최병직, 송재만 등이 있었다.

송재만은 대호지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준비되는 과정에서부터 참여하였다. 면장인 이인정의 조카 이대하의 생일을 이용하여 구체적인 논의를 전개하는 자리에 이인정, 남주원, 남상돈, 이춘응, 남상집, 한운석, 남상락, 김홍균, 홍월성, 이대하, 이두하, 민재봉 등 40여명과 함께 송재만도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인정은 총 책임자가 되었고, 송재만은 행동대장이 되었다. 이렇게 했던 이유는 면사무소의 지위와 시설 및 업무를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정확하게는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이 송재만을 비롯한 면서기들에 의해 기획되고 추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일제 법원의 판단도 그러했음을 판결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호지면 면서기였던 민재봉의 판결문에는 대호지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구체적으로 논의한 시기를 1919년 3월26일이었다고 파악하고 있다. 강태원, 김동운, 민재봉, 송재만이 대호지 면사무소에서 시국논의를 하던 중 김동운이 “현재 각 지방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있음에 서산군에서 부르지 않음은 다른 지방에 대한 부끄러운 일이니 우리도 고창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수의 사람을 집합시켜야 하는데 우선 사람들을 집합시키는 방법을 알아보자”고 하면서 독립만세운동이 준비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다음날인 3월27일 강태원, 민재봉, 송재만과 다시 만나 논의한 자리에서 김동운은 “각 구장에게 도로를 수선한다는 취지의 공문을 발송하여 4월4일 오전 8시경에 면내 각 호는 1명씩을 면사무소에 집합하게 하여 만세를 고창하게 하고, 그 날이 천의 시장의 장날인 고로 군중을 인솔하여 시장으로 가자”는 제안을 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대호지면 면서기들의 논의는 모두 기획한 대로 실현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면소사인 송재만이 가장 중요한 행동대장의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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