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호 칼럼■

 가을걷이가 끝난 뒤의 텅 빈 들판을 지키는 이가 있다. 모두 다 떠나버리고 아무도 없는데 홀로이 남아 지킬 것 없는 빈들을 지키는 이.
 저물녘 황량해지는 들판 가운데로 나가면, 어느 모퉁이 논머리에 그림자를 길게 늘이고 선 그가 보인다. 그는 노을빛에 물들어가는 제 그림자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아무 움직임도 없이 그저 쓸쓸해 보이는 이, 그는 허수아비다.
 허수아비는 인간의 이기(利己)가 만들어낸, 조물주의 창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구조물이다.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새나 여타 동물을 쫓기 위해 사람 형상으로 그냥 아무렇게나 만들어 세웠을 뿐이다. 서양에서는 허수아비를 scarecrow라 한다. 까마귀를 쫓는 데 이것을 사용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한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허수아비의 임무도 끝이 난다. 그가 가을 벌판에 홀로 외로이 남아있을 의무는 없다. 그런데도 그가 떠나지 않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터인데,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그 이유를 가늠할 길은 없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서서, 아마도 그는 지금 몹시 외롭고 있을 것이다.
 허수아비는 허수(虛首)가 달린 아비라는 뜻이다. 이 말은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데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 허수아비란 말이 이런 데 쓰여도 되는 것일까. 제 새끼 이외에 남이 자기 닮은 것을 싫어하는 인간의 속성이 허수아비를 너무 비하하는 것이나 아닌지. 단지 형상이 인간을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정작 인간의 형상을 본떠서 허수아비를 만든 장본인이 인간 자신이면서.
 허수아비가 언제나 지킬 것 없는 빈들이나 지키고 서 있는 그런 존재는 아니었다. 요즘에 와서야 농사를 덜 짓기도 하고, 비닐하우스다 하여 지붕을 덮어버리는 경작법 등으로 용도가 줄어들기도 했지만, 한해 중 농사철 동안은 그런대로 바빴었다.
 특히 가을 들판에서 다 익은 벼이삭이 황금물결 되어 찰랑거릴 때면 허수아비도 덩달아 신이 났었다. 한눈팔다 숨어드는 새떼를 놓칠세라 두 눈 부릅뜨고서 잠시도 깜박거리지 않고 참지 않았던가. 주인이 새떼를 향해 훠허이! 하고 소리 지르면, 소리 나지 않는 소리나마 더 크게 질러 새를 쫓지 않았던가. 바람이 불어주면, 벼 이삭 사이에 매달린 참새를 마저 쫓아내느라, 불어준 바람보다 몇 배 더 힘차게 몇 배 더 여러 번을 흔들어대지 않았는가. 허수아비는 그때를 스스로가 각광받았던 시절이노라고 생각하고 있다. 맞는 생각이다. 그랬었다.
 허수아비는 들판의 역사를 다 알고 있다. 제 눈으로 다 보아왔기 때문이다.
 지금 논머리에 말뚝으로 박혀있는 몸뚱이는 뒷산에 서 있는 큰 나무의 가지였었다. 산 위에서 들판은 손바닥을 보듯 훤히 내려다보였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커왔다. 윗도리에 걸쳐진 저고리는 주인사내가 입고서 사시장철 들판을 휘돌다 해지자 물려준 것이고, 머리통은 작년에 이 논에서 추수를 끝낸 벼 짚이다. 돌돌 말려서 얼굴이 된 헝겊대기는 논을 갈아엎고 볍씨를 뿌릴 때부터 새참을 내오는 주인 아낙의 정수리 위에서 함지박에 짓눌려 들길을 오가던 똬리였다. 주인 아낙이 입던 내의였다는데 윗도린지 아랫도린지는 아직도 모른다.
 이 들판을 오랜 세월 내려다보았고, 이 들판을 사시장철 휘돌아 다녔고, 또 이 논에서 나고 자랐고, 들길을 따라 수없이 오갔는데, 이런 허수아비가 들판 사정을 무엇인들 모르는 게 있겠는가.
 이렇듯 정신 말짱한 허수아비를 제구실 못하는 사람으로 비유하는 것은 맞지 않는 듯하다. 허수아비는 감정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허수아비의 사랑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는가. 허수아비와 사랑을 한 참새 이야기가 있다.
 아니다 참새를 사랑한 허수아비의 얘기다. 서로 사랑을 한 것은 맞지만, 사랑의 질풍노도가 잦아들자 감정의 격랑사이에서 빠져나온 참새는 저만의 자유를 찾아 날아 가버렸고, 부동의 자세인 허수아비는 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 혼자 여위어가고 여위어 가는데, 참새에 홀려 넋 나간 꼴을 보다 못한 주인이 화가 나서 허수아비를 불태워버리고 말았다는 슬픈 이야기다.
 사랑엔 국경도 없다지만, 국경 초월하는 사랑이 어찌 쉬울 수 있겠으며 당사자들이 겪는 고초와 심려를 누가 속속들이 다 알 수 있겠는가. 허수아비의 사랑의 비극을 막아주고 싶어졌다. 그러자면 허수아비를 떠나지 않을 사랑을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허수아비의 짝으로 허수어미를 세우자. 허수아비가 마음 놓고 사랑할 수 있는 허수어미를. 그리하여 더 이상 허수아비 혼자서 빈 들판을 지키게 하지 말자.
 허수아비와 허수어미가 사랑을 하여 허수아이를 낳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텅 비었던 들판이 허수아비의 가족들로 가득 찰지도 모른다. 허수아비와 허수어미와 허수아이들로.
 세월이 흐르면 허수아비는 허수할아비가 되고, 허수어미는 허수할미가 되고, 허수아이들이 허수아비가 되고 허수어미가 될 것이다. 그리고는 또 허수아이를 낳고, 드디어 허수아비 3대 일족의 구색이 갖춰지는 것이다.
 가을이 되면 곳곳에서 각종 허수아비 축제가 펼쳐지고, 축제기간에는 각양각색의 허수아비가 등장하기도 한다. 남녀, 노소, 소년소녀, 처녀총각 심지어 동물모양까지 단장시켜 허수동물(?)을 만들어낸다. 이런 축제용을 말하는 게 아니다. 진정성이 있는 허수어미를, 허수아비가 사랑할 수 있는 허수어미를 만들자는 것이다. 빈들을 홀로 지키며 선 허수아비의 심정을 이제 알만하지 않은가, 뻥 뚫린 그의 가슴에 속절없이 드나들이 하는 찬바람이 느껴지지 않는가.
 들판에 허수아비는 줄어가는데 허수아비로 불리는 사람은 늘어가는 이즈음이다. 들판의 허수아비가 인간세상으로 속속 환속(?)을 하는가보다. 지금 인간 세상에는 허수아비로 불리는 사람도 늘어가지만, 스스로 허수아비라고 자조하는 사람이 더 늘어가고 있다.
 여기서 유념할 것은, 인간세상에서는 허수어미가 소용이 닿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 인간세상에서는 허수아비가 늘어간다고 허수어미까지도 덩달아서 늘어갈 생각은 아예 하지말기를 당부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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