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철 준 (朴哲濬) / (예) 공군대령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남이흥

영변에 주둔한 이괄 휘하에는 평안도 최정예 병사 1만2000명과 임진왜란 당시 귀순한 조총수 및 검객 130여 명이 배속돼 있었다.
막강한 군사력을 손에 쥔 이괄은 심복부하 이수백, 기익헌 등과 치밀한 계획을 세워 구성도호부사 한명련을 끌어들였다.


관군과 맞닥뜨린 이괄은 관군의 장수들 중에서 남이흥, 유호걸, 박진영이 핵심을 이루는 인물이라고 판단하고 이들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남이흥의 부하 남두방이 마침 개인 자격으로 영변에 갔다가 이괄군에게 붙잡힌다.
이괄은 남이흥에게 전하라고 편지를 써주면서 그를 돌려보낸다.


편지를 받은 남이흥은 자신과 도원수 장만을 이간하려는 술책임을 간파하고 뜯어보지도 않고 평양에 주병하고 있던 장만에게 보고했다.
장만이 뜯어본 편지에는 ‘현명한 임금이 위에 계시는데 조정에는 흉악한 무리가 가득 찼으니 어찌 숙청하지 않으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후 남이흥의 상관인 장만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다. 장만은 병을 앓고 있어 남이흥을 중군으로 삼아 군사의 지휘권 등 모든 일을 그에게 맡겼다.
그 사이 반란군은 영변을 출발해 평양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관군의 군사력이 반란군보다 적음을 우려하는 장만에게 남이흥은 반란군 장수들에게 밀서를 보내 투항을 권유하라고 청한다.
장만은 마침 평양에 있던 이윤서의 종을 불러 편지를 주인에게 전하라고 이른다. 밀서를 받아본 이윤서는 귀순하기로 결심하고 유순무, 이신, 이각 등을 설득한다.


야음을 틈타 한꺼번에 진을 무너뜨리고 거느리던 군사 3,000명을 데리고 귀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반군의 기세가 꺾이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이괄은 평양을 피해 황주 방면으로 전진했다.
이 사실을 안 남이흥은 휘하에서 가장 날쌔고 용맹스러운 군사 1,800명을 선발해 추격부대를 편성하라고 지시했다.

벌써 해가 저물었지만 한시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라 반란군의 뒤를 치려 한 것이다. 남이흥이 이끄는 추격군이 황주 신교에 다다르자 반군은 이들을 발견하고 대항했다.
이때 남이흥은 전선을 마주한 반군에게 항복하라고 호령했다.


추상같은 호령에 반란군 무리 중 허전, 송립 등이 마병 1,200명을 이끌고 투항했다. 이들은 일찍부터 이괄이 심복으로 삼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선봉장들이었다.
그러나 일찍이 남이흥이 만주에 있을 때 의식주의 은혜를 입은 바 있는 이들은 남이흥의 넓은 아량과 고매한 인품에 감복한 터다.


무악재의 최후 결전

남이흥이 이끄는 관군은 반란군을 추격해 평산 경계에 이르렀다. 밤이 깊어지자 남이흥은 결사대를 조직해 적진 깊숙이 쳐들어갔다.


이들은 삽시간에 적진을 격파하고 퇴로를 끊었다. 당황한 반란군의 형세는 약화되었으나 이내 평산 동남쪽 25리 지점인 저탄으로 진출했다. 저탄은 군사적 요충지로 예성강 도하(渡河)지점이었으므로 관군은 이미 이 여울목 건너편 기슭에 제2방어선을 치고 있었다.


방어사 이중돈과 이덕부가 이끄는 관군부대는 태백산성으로부터 별다른 정보가 없었던 까닭에 방심하여 전투태세를 풀고 있었다.
이를 틈탄 반란군이 기습에 성공함으로써 관군은 처참한 살육전 끝에 전멸당하고 말았다.


강을 건너 진을 친 반란군은 관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자 장수 여덟 명의 머리를 베었다며 남이흥이 이끄는 추격부대에 보냈다.


관군의 투지와 사기는 금세 꺾였다. 이렇게 되자 남이흥은 크게 웃으면서 “그 여덟 장수는 평소에 내가 알던 사람들이다. 보내온 수급(首級)은 그들과 다르다. 죽은 졸병의 머리를 걸어놓고 나를 속이려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남이흥은 반란군이 임진강을 건너면 서울이 혼란스러워질 것이니 결사적으로 막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인조는 이미 공주로 파천(播遷)한 상황이었다. 도원수 장만은 “서울이 격파되었으니 싸울 곳이 없다. 임금의 수레를 따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남이흥은 그 명령을 좇지 못하겠다며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이 무렵 반군은 개성을 넘어 남진했다. 죽음을 결의한 장만과 남이흥은 추격군을 이끌고 혜음령(지금의 광탄 용미리)에 도착했다.
벽제근교에서 병사들을 정지시킨 이들은 작전회의를 열었다. 지금쯤 이괄군은 서울에 입성했을 것이니, 도성을 탈환하기 위한 두 가지 방안이 제시되었다.


첫째, 반군이 도성을 장악한 지가 얼마 안 되므로 주민들이 아직 적도(賊徒)들을 따르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체되면 관망하던 무리가 역모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여 협조할 것을 염려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병력만으로 조속히 공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세가 불리한 아군으로서는 소수 병력으로 결전해야 하는 일인 만큼 위험이 따랐다.


둘째는 지구전(持久戰)인데, 경기관찰사 이서의 부대를 독촉해 도성 동쪽의 도포를 봉쇄하고 서울 이남의 관군부대를 불러올려 도성 남쪽 통로를 차단한 다음 우리 부대는 북방퇴로를 차단하여 적의 군량로를 끊어놓고, 각 도의 지방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협동작전으로 공격하는 방안이 제시되었다.남이흥 등 주요 장수들이 첫 번째 안을 찬성하였다.


정충신은 유효걸 이희건 김경운 최응일 신경원이 이끄는 부대와 함께 무악재 마루턱을 먼저 점령하고, 남이흥과 변흡의 부대도 어둠을 무릅쓰고 달려가 안산에 진출했다.


이확은 100명 포수로 편성한 별동대를 거느리고 치마바위 계곡에 잠복해 창의문 통로를 차단했다. 경기관찰사 이서와 황해관찰사 임서는 낙산에 진출해 협공태세를 갖추었다.추격군이 무악재를 점령한 사실을 안 반란군도 작전회의를 열었다.


회의 결과 일부를 무악재로 보내 정충신의 부대를 상대케 하고, 대신 조총으로 무장한 항왜(降倭·왜란 당시 항복한 일본 병사들)와 정예병을 창의문으로 우회출동시켜 배후의 도원수 본영을 기습하기로 했다. 주장(主將)을 사로잡기 위한 계책이었다.

반란군 장수들은 모두 이번 기회에 ‘오합지졸 관군’을 붕괴시킬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다음호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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