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추윤 교수

600년 전에 맹곶 말목장이 있던 곳
현재 지도상에 큰마섬(大馬島), 소마(小馬)로 존속

조선시대 목장은 고려시대 목장을 재건하는 한편 수초가 많은 곳을 찾아 새로 목장을 설치하여 국영, 사영의 다양한 목장이 많이 있었다. 그 당시 사육되는 목축에 다라 말목장, 소목장, 양목장, 양목장, 돼지목장, 양목장 등이 있었다. 말목장의 수는 <세종실록지리지>에 59개, <동국여지승람> 산천 조에 87개소, <번계수록>에 123개, <대동지지>에 114개, <목장지도>에 138개소, <증보문헌비고>에 172개 등이 나와 있다. <증보문헌비고>에 나와 있는 목장이 114개인데, 폐목장이 55개소, 불분명한 것 3개소 등 총 172개소가 전한다.

이 가운데 충청도에는  서산-대산곶 목장, 태안-이원곶 목장, 원서면 독진도 목장, 홍주-홍량곶 목장, 면천(송산면)-창택곶 목장 등 5곳이 있고, 태안-지령산 목장, 안면곶 목장, 신곶 목장, 대소산 목장 그리고 홍주-원산도 목장 등 5개는 폐목장이다. <증보문헌비고> 상에는 이미 석문의 맹곶목장은 폐지되어 대산곶 목장으로 옮겨갔고, 송산면에 창택곶 목장이 새로 나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말목장은  육지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섬이나 바닷가에 뽀족하게 내민 땅인 곶(串)에 설치하였다. 석문면 맹관(孟串) 지역에 말목장이 있어서 마도(馬島)가 유래한 것이다.

근세에 이르기 까지 육상교통 수단의 하나로 마필이 많이 사역되었는데, 평시에는 교통기관으로 사용되고, 전시에는 군마로 부려졌다. 따라서 우리나라 각지에는 목마장(牧馬場)이 전국에 많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유래된 지명이 전국에 많다. 북한 지방의 함흥시 치마동(馳馬洞)은 조선 태조가 기마훈련을 하던 터이고, 곡산군 봉명면 마유령(馬踰嶺)은 말이 조곡을 비롯한 화물을 싣고 넘는 고개라 하여, 덕원군 풍상면 마식령(馬息嶺)은 마필에 휴식을 주기위해서 쉬었다 가는 고개라  하여, 경북 문경의 남쪽 2km거리에 있는 마원리(馬院里)는 역마가 있던 곳이고, 용강군 신령면에는 광량만 염전에서 소금을 싣어 나르던 마염리(馬鹽里)가 있다.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馬田里)는 옛날 공해전에 속했던 마전(馬田)이 있기에 유래했다.

석문면 장고항리는 본래 내맹면 지역으로 장고목처럼 생긴 지형이라 장고항(長鼓項)이라 하였는데, 1914년에 행정구역 통페합에 따라 대마도(大馬島), 소마도(小馬島), 장고항, 사동을 병합하여 장고항리라 하여 석문면에 편입시켰는데, 일찍 조선시대에 맹관(孟串)지역에는 말목장이 있었다.

장고항리에는  대마도(大馬島, 큰마섬)와  소마도(小馬島, 작은 마섬)마을이 있는데, 조선시대 맹관목장(孟串牧場)이 이 지역에서 있어서 말(馬)을 기른데서 유래하였다. 김정호의 청구도(靑邱圖,1834)에 보면, 당진현(唐津縣) 내맹면(內孟面)에 ‘孟串’이란  글자와 함께 ‘長古項’, ‘橋路里’가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1454) 충청도 당진현조에 보면, 이미 ‘1454년 이전에 맹곶에 목장이 있었는데, 둘레가 21리이고 정미년(세종9년, 1427) 수초가 자라지 않아 서산의 대산곶으로 이전하여 방목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古牧場在縣西孟串周回 二十一里丁未年以水草不利放于大山串)’. 같은 책 서산 대산관 조에 보면, 태안 다리관 목장이 병오년(세종8년), 당진 맹관 목장이 정미년(세종9년)에 수초가 좋지 않아 대산곶 목장으로 옮겨오게 되어서 말이 942필이나 방목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 당진현 산천 조에 보면 ‘맹곶은 현의 서쪽에 있는데 둘레가 32리이고, 옛날에 목장이 있었다(孟串在縣西周三十二里古有牧場)’라고 기록되어있다. <충청도읍지(1845)>에는 ‘목장이 없다(牧場無)’ 라고, <대동지지(大東地志, 1866)> 당진현 역참 조에는 ‘맹곶목장은 폐했다(孟串牧場廢)’라고, 또 산수 조에는 “맹곶이 서북 30리에 있는데 바다로 쑥 나온 곳인데, 그 끝은 50여리가 되고 더불어 서산의 대산곶과 마주보며, 맹곶에 들어오는 자는 장고항과 교로리를 경유한다(孟串西北三十里斗入于海其末爲五十餘里與瑞山大山串相對入孟串者路由長鼓項橋路里)‘라고 기록하고 있다.

가장 최근인 일제시대에 발간된 <조선환여승람(朝鮮&#23536;輿勝覽, 1933>에는 ‘맹곶이 군의 서쪽 있는데, 둘레가 32리이고, 옛날에 목장이 있었다(孟串在郡西周三十二里古有牧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석문면 장고항리 대마도(大馬島), 소마도(小馬島)에 600년 전에 말 목장이 있었음을 알수 있다.

이 맹곶 목장의 목장토의 소유 관계를 둘러싸고, 숙종29년(1703) 12월부터 30년 10월까지 1년에 걸쳐서 치열한 다툼이 있었음이 숙종실록에 전하고 있다.

당진지방 사민(士民) 300여명의 정장(呈狀)에 의하면, ‘맹곶 한면의 사방 둘레 30여리안에 민인(民人)과 사대부의 전토(田土)가 600여 결(結)이고, 민호가 700호, 300여년 전부터 세전해 오던 땅인데 가평의 한학(韓學)이란 자가 자기의 선조인 청원위(淸原尉)의 사패전답(賜牌田畓)이라 일컬으며 궁가에 방매(放賣)하였는데, 그후 궁차(宮差)들이 내려와 약탈과 위협을 하자 백성들이 일제히 정소(呈訴)하고 있다’라는 내용이다.

이에 궁가에서 양안(量案)을 검토한 결과 한학의 거짓이 드러남에 따라 순영에 잡아 가두려하자, 한학이 태복시(太僕侍)에 도망가서 이르기를 ‘맹곶은 목장이라 여지승람에 고목장으로 기재되어있습니다.’라고 하자, 태복시가 이를 믿고 공문을 보내 적간(摘奸)하고 재차 목장으로 환원하는 과정에서 사민들의 반발이 일어난 것이다. 즉 주민들은 ‘300여년 전에 편찬된 여지승람에 고목장이란 표현이 있다’하여 갑자기 태복시에 소속시켜, 1000여명의 사민의 거처와 경작지를 빼앗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을 청원하는 것이다.

 

 

저작권자 © 당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