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추윤 박사

신평면 운정리에  600여년전에 세워진 매향비석과 돌미륵

당진시내에서 삽교천 방조제로 통하는 길을 따라 가다가 신평면 운정리(신당길 255-67) 삽교천변 운정 양수장 근처에 가면 옛 백제시대의 신평현(新平縣)의 읍치로 추정되는 신평현성(新平縣城)이 있고, 그 인접지 탑재마을 수로 변에 <미륵댕이> 마을이 있다. 이곳 마을 수로 변 옆에 가면 정말 멋진 돌미륵 하나가 서 있고, 그 옆에 작은 돌비석이 하나 나란히 서있다..

이 돌미륵은 남근석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크기는 높이 217cm, 두께 70cm 내외로 얼굴만의 크기는 92cm 이다. 상호 및 의습의 윤곽에 관해서는 상호에 약간의 윤곽만 있을 뿐 다른 것은 자세하지 않다. 이외 불적에 관련된 것은 보이지 않고, 다만 돌미륵 옆에 윗부분이 뾰족하고 밑부분이 넓은 돌이 있다.  ‘宣德三年 戊申 二月一日’이라고 쓴 작은 입석(立石)으로,  돌미륵과 함께 옆에 나란히 서있다. 이 입석에는 위의 글자이외에도 여러 글자의 명문이 음서되어 있다. 이 명문석과 돌미륵과의 관련성은 확실하지 않으나 바로 옆에 위치한 것으로 미루어 돌미륵과 명문석이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본다면 돌미륵은 대략  조선 세종 10년 (1428년)시기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대체로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된 돌미륵으로 여겨진다. 돌미륵은 자연석을 투박하게 다듬어 삼도(三道)와 옷 주름살 등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작은 돌에 새겨진 명문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宣德三年 戊申,  二月一夕 (笠)(??)  筵?, 戶長 扈吉底(?) 溱(?)
施主 縣內 香徒 十(?)  三(?), 化主 全百(石),  (二?) 金乙浦(漕?)

명문석의 기록으로 보아 조선 세종 10년 (1428년)에 세워진 매향비(埋香碑)임이 틀림없다.   신평의 토성(土姓)으로 호장(戶長)인 호길저(扈吉底)가 주도하여, 신평현 내에 사는 불교 향도(香徒)들을 모아서 시주한 후에 1428년에 매향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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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평면 삽교천 변에 600년 전 매향비
               마을 수호신 역할하는 미륵불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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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향비(埋香碑)란 향을 묻으면서 그 연유와 시기, 장소, 관련된 사람(집단)을 기록한 비문을 말한다. 비문은 자연석에 글자를 새기는 경우도 있고, 인공적으로 만든 비석에 비문을 파서 입비(立碑)하는 경우도 있다. 매향(埋香)은 향(香)을 묻으면서 생기는 침향(沈香)을 매개로 하여 미륵부처와 연결되기를 기원하는 민중의 불교 신앙 의례이다. 우리나라에서 매향의식이 일반화된 시기는 14-15세기로, 이 시기는 여말선초시기로 변혁의 시기였다. 따라서 전환기에 처한 민중들이 현실적 위기감을 극복하고, 보다 더 마음의 평화를 구하고자 매향의식을 주도했던 것이다. 특히 내포지방처럼 왜구의 침탈이 심했던 해안 지방은, 민중의 입장에서는 왜구의 침입이 큰 불안 거리가 충분히 되었던 것이다. 고려말 이래 조선초까지 충청도 내포 해안 지역은 조운선을 약탈하려는 왜구의 출몰이 많았던 지역이다. 이런 해안지역의 민중들은 피부로 느끼는 현실적 불안감을 구원받고자 미륵신앙과 결합하여 매향을 했던 것이다. 매향비가 발견되는 곳이 거의 전부 해안가 지방이라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락 이름도 이 미륵불(彌勒佛)이 있는 당이 있었기에, 거기에서 유래하여 ‘미륵당’이 변하여 ‘미륵댕이’가 되었다. 옛날에는 당(堂)으로서 보호각을 세워서 매년 용날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미륵은 범어(梵語)로 자씨(慈氏)로 해석하고 있으며 현존불(現存佛)이 아니고, 미래에 나타난다는 미래불(未來佛)이다. 두솔천(兜率川)에서 나고 자라며 내원에서 수행하고 있는 미래불이다. 석가모니가 열반(涅槃) 후 56억7천만년 후에 이 지구상에 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 용화수(龍華樹) 밑에서 성불하고 삼회(三會)의 설법으로 석가모니의 설법에서 빠진 중생을 계도한다는 용화삼회(龍華三會)를 주관한 부처님이다. 따라서 이런 미륵이 서 있는 곳에서는 미륵이 부락의 표상물로 되어서 촌락지명화한 경우가 우리나라에 많다.

미륵은 하나의 주술적 성격을 띤 민간 신앙으로 득남, 치병, 국가수호, 부락수호, 개인적 수호 등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했다. 옛날부터 우리나라는 남아선호 사상이 있어서 득남을 기원하는 하나의 민간 신앙으로 미륵불을 사용했다. 사내를 낳지 못하는 아낙들이 산천을 찾아서 바위나 부처를 대상으로 제사를 올렸는데, 이것이 기자석(祈子石), 기자불(祈子佛)이다. 미륵불의 세계는 늙고도 병이 없는 세계라는 미륵경(彌勒經)의 말에 따라 인간이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사고에서 벗어나려고 무병과 치병을 미륵불에 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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