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방 광주가 난리댜. 광주로 들어가는 길목을 다 가로막고 있다네. 얼마 전에는 아들 보러 광주 기어코 들어가야 한다는 애비를 그 자리서 죽이고, 길 가는 사람을 이유도 없이 총으로 쏴서 죽이고 데모 허는 대학생들은 창으로 쿡 찔러서 트럭에 실어 나른다는구만. 우리 아들 임자 말대로 광주로 대학교를 보냈으면 큰일 날 뻔 했지 뭐여.”

“아이고 그냥 누가 헛소리 헌거지라이. 이유도 없이 기냥 길 가는 사람을 왜 죽인다요? 테레비 안 봤소? 그 북한 괴뢰군이 거기로 숨어들어갖고 그놈들 잡을라고 그런다고 안하요?”

“테레비 뉴스는 다 거짓말이랴.”

“옴마, 뭔일이까이....”

초등학교 2학년 어느 한 날 밤 염려 가득한 목소리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누는 소설 같은 대화를 들으면서 어린 마음에 무서워서 몸서리 치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이 들었던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당시 광주에서 약 40분 거리에 있는 우리 고향에서는 이 통로 저 통로를 통해 들려오는 이런 저런 괴소문들 때문에 ‘설마’하면서도 ‘무섭다’며 서로 말을 아끼고 있었습니다.

훗날 철이 들어 두 분이 나누시던 소설 같은 대화 내용이, 그저 한낱 괴소문일거라며 묻어버렸던 그 말들이 소설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는 더더욱 몸서리 쳤습니다.

“어머니가 산 증인이시네요.”

한평생을 광주에서 살아오신 시어머니께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그라제. 그때 일을 생각허믄 몸서리가 쳐지제. 나가 긍께 도청 바로 앞에 건물에서 일을 했기 땜에 다 봤제. 태극기 흔들면서 나가는 여대생을 총으로 쏴서는 트럭에 줄로 매달아서 끌고 댕겨. 하여튼 도로 가운데로 나갔다 허믄 죽는거여. 글고 보란듯이 시체들을 트럭으로 실어다가 도청 앞에다가 쏟아서 쌓아놔. 글고 우리 애기들은 그때 초등학생이라서 괜찮았지만 군인들이 총 들고 다니면서 집집마다 수색을 해서는 청년들은 다 잡아갔어. 그래서 동네 청년들이 다 무등산으로 숨고 난리였당게. 아이고 산 증인 할머니 한 분 엊그제도 만났다. 난리통에도 무등산께에서 딸기밭을 허는 노인들이 딸기를 팔아야 먹고 사니께 영감 할멈이 따갖고 내려오는디 군인이 가로막드랴. 어디 가냐고. 딸기를 팔아야 먹고 살 것 아니냐고 허니께 그 자리서 영감을 총으로 쏴불드랴. 할매는 산으로 냅다 도망쳐서 혼자 살았다면서 시방도 울면서 얘기 허신다. 우리도 그때는 빨갱이가 내려와서 그 난리가 난 줄 알고 있었제. 그란디 이유도 없이 맥 없는 사람들을 죽이니께 광주시민들이 들고 일어나붓제.”

지난 주말 가족이 함께 ‘택시운전사’를 보고 참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할머니댁 광주 이야기가 나오니 그 어느 때보다도 집중해서 영화를 본 아홉 살 아들놈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 어린 나이지만 어머니 손을 잡고 도청으로 나가 힘을 실었다는 남편은 학교도 못 가고 날마다 울려퍼지는 총소리에 긴장의 나날을 보냈다고 증언합니다.

“지금까지도 당시 사건을 왜곡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속상하고 안타깝다.”며 한숨 짓습니다. 희생하고 죽은 사람 되살릴 수 없고, 받은 상처 씻을 수는 없지만 왜곡하지 말고 그저 사실을 사실로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광주시민들에게는 작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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