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당진역사문화연구소 김학로 소장 2

지난 인터뷰에서 합덕봉기에 대해 들었다. 시대순으로 현재 당진관내에서 두 번째 동학유적지라고 볼 수 있는 승전목에 대해 들어보고 싶다. 승전목 전투는 언제 벌어진 전투인가?
승전목 전투는 내포지방 동학농민군이 중요한 기로에 서 있던 1894년 음력 10월24일(양력 11월21일) 벌어진 전투이다. 이 시기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조선의 국권을 위협하던 시기로 전라도지방에서 전봉준 장군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2차 기포를 한 시기였다. 전라도지방에서 동학농민군이 공주로 진격하고 이에 맞춰 전국에 기포령이 내려졌고, 내포지방 동학농민군 역시 이에 따라 군사를 배치하고 군대를 움직이던 시기였다.

승전목 전투가 벌어진 배경을 설명해 달라.
내포지방 동학농민군이 본격적으로 기포한 1894년 음력 10월1일 이후 내포지방 전역을 단숨에 석권했다. 하지만 당시 홍주목사였던 이승우는 당대 유능한 관리로 나름대로 치밀하게 대처하여 내포지방 동학농민군을 각개격파식으로 제압해 나갔다. 이승우의 이러한 전략에 내포지방 동학농민군은 모두 패하여 내포지방 전역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나마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것이 10월16일부터 21일까지 6일 동안 싸운 합덕전투가 유일했다. 이렇게 홍주관군에게 일방적으로 패하여 흩어지게 되자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 죽게 생겼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죽고 말 것인가? 죽더라도 한번 제대로 싸워보자 그래서 내포지방 동학농민군들이 하나 둘 운산 여미벌에 모여들게 된 것이다.
반대로 관군과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여미벌에 내포지방 동학농민군들이 모여 있다고 하니까 이번에 뿌리채 뽑아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평택 진위에 있던 일본군이 면천에서 여미벌로 가기위해 승전목을 지나게 되었던 것이다.

전투 양상은 밝혀진 것인가?
승전목 전투에 관해서는 당시 전투에 참여하였던 아카마츠(赤松國封) 소위가 전투상보를 보고한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자세히 나와 있고, 서산 출신 유생이 작성한 『피난록』과 홍건이 쓴 『홍양기사』 등에 일부 기록이 남아 있다. 전투의 양상은 일본군 후비보병 19대대 서로군 지대 1개소대 2개분대 89명과 조선 경군 34명이 전투에 참여하였고, 내포지방 동학농민군은 2만여명이 이에 맞섰다. 기록에 의하면 오전 10시경부터 시작한 전투가 오후 3시30분까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일본군은 자동격발식 스나이더 소총으로 무장하여 화승총으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에 비해 전투력이 1000배나 높았다. 일본군은 이렇게 우세한 전력을 믿고 승전목 계곡 깊은 곳으로 밀고 들어왔던 것 같다. 반면에 동학동민군 입장에서는 정상적인 전투로는 일본군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최대한 일본군을 승전목 깊은 계곡 안으로 유인했다. 일부의 병력을 모아 놓고 일본군이 총격을 가하면 흩어지는 방식을 여러차례 되풀이 하였던 것이 기록에 나온다. 이렇게 계곡 깊은 곳까지 유인한 이후 때마침 불어온 서풍을 이용해서 계곡 정상에서 볏단에 불을 붙여 계곡 밑으로 던져 일본군을 물리쳤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쉽게 보고 계곡 깊숙이 들어왔다가 총알세례에 화공까지 당하게 되니까 연기 때문에 앞은 보이지 않으니 겁을 집어먹고 배낭이든 무기든 모두 버리고 총 한자루씩만 들고 도망쳤던 것이다.

승전목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 있나? 가령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라던지 개별 인물사는 밝혀 진 것이 있나?
최근에 이상면 박사가 자신의 할아버지 이종만 장군이 승전목 전투에 별동대장으로 참전했다는 증언을 하여 주목을 끌고 있다. 이상면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동학농민군에는 별동대를 두었는데 별동대는 관군에게 빼앗은 레밍턴 소총으로 무장한 기마부대였다는 것이다. 별동대는 전봉준 장군이 직접 지휘하였고, 위급한 전투에 기동성 있게 대처를 했는데 이종만 장군이 이끄는 별동대가 승전목 전투와 송악산 전투에 참전하여 전투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승전목에서 승리를 했다고 하지만 그 의미는 무엇인가? 동학농민혁명 자체가 전쟁에서 졌다. 한 지역에서 승리한 것이 전체 동학농민혁명이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나?(의미 설명)
보통 동학농민전쟁을 생각하면 일방적으로 패배한 전쟁이나 무자비하게 학살당한 안타가운 사건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승전목 전투를 통해 동학농민전쟁에서 일방적으로 패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고 생각한다. 승전목 전투는 불가능에 가까운 승리를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쟁터에서 월등한 전력 차이를 극복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동학농민군 입장에서는 전력이 우세한 일본군에 맞서 어떻게 전투를 벌여야 승리할 수 있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일본군 역시 승전목 전투의 패배 이후 지형이 불리한 전투는 피하는 방식으로 전투 양상을 바꿨다.
승전목 전투의 승리 이후 내포지방 동학농민군은 엄청나게 사기가 올라서 내포지방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신례원 관작리 벌판으로 모여 들었다. 기록에 의하면 면천군수 조중하가 면천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일본군들은 홍주성으로 도망친 이후 다음 전투인 신례원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맞은 신례원 관작리 전투에서 내포지방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이 빠진 홍주관군을 일방적으로 격파할 수 있었는데 이는 전적으로 승전목 전투의 승리였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이렇게 내포지방 동학농민군에게는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승전목 전투의 승리였다. 내포지방 동학농민혁명에서 승전목 전투를 기억하고 의미를 되새겨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승전목 전투의 승리는 전체 동학농민전쟁에서 일본군에 맞서 유일하게 승리한 전투라로 전체 동학농민군에게 막강한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했다는 측면에서 반드시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전투라고 생각한다. 

현재 승전목이 위치한 지역은 석산개발과 도로개설 등으로 인해 훼손이 됐고 더 될 것으로 보인다. 보존 대책은 있나?(앞으로의 계획)
승전목 전승지가 파괴된 것은 전적으로 후손들의 무지함에 있다. 개발이라는 논리 앞에 무참하게 파괴된 승전목 전승지 일대를 보면 정말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더 이상 파괴를 막아햐 할텐데 곧이어 국지도70호선이 확장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승전목은 반드시 복원하여 보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승전목 일대의 문화재 지정이 시급히 필요하다. 하다못해 당진시에서 향토유적이라도 지정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승전목 전승지 복원 및 보존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이러한 대책을 바탕으로 승전목 전승지의 역사적 의미를 부각한다면 국가적인 차원의 대응책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확실한 보존 대책으로 승전목 전승지를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으로 조성하면 된다. 앞서 설명한 대로 동학농민혁명 유일의 전승지라는 역사적 의미를 부각하여 기념공원에 기념탑도 세우고 기념관도 세워 보존한다면 당진에 새로운 명소가 생기는 것이다. 지역 주민들에게 당진 사람으로 자부심도 느낄 수 있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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