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당진역사문화연구소 김학로 소장

 편집자 주  최근 당진 지역의 동학 유적지에 대해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동학 관련 단체가 주목 하고 있는 가운데 오랜 기간 동안 내포와 당진의 동학농민혁명을 알리고 유적지를 보전하려고 노력하는 당진역사문화연구소 김학로 소장을 만났다. 당진의 3대 동학 유적지인 합덕, 면천의 승전목, 수청 의암 손병희 유허지를 중심으로 인터뷰를 진행할 예정이다.

● 당진의 동학농민혁명사에 대해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었던 것으로 안다. 특히 당진을 벗어나면 당진 지역은 동학사에서 언급된 적이 없지 않았나?
사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당진 지역의 동학사에 대해 연구해 보자는 움직임이 구체화 됐다. 인근 태안이나 예산 같은 경우에는 후손들이 남아 있어서인지 지역에 남아 있는 동학농민혁명 관련 연구나 기념공원화가 이미 진행됐다. 그것을 생각하면 당진은 많이 늦은 것이다. 특히나 아쉬운 것은 일본군을 상대해 최초이자 유일하게 승리했다고 볼 수 있는 면천의 승전목은 이름으로만 남아 있고 석산 개발 등으로 인해 주변지가 파괴되고 있다. 동학의 3대 교조이자 민족대표였던 의암 손병희 선생이 머무르며 전쟁 패배 이후 동학 조직을 지도했던 동학대도소 역시 당진에 존재했지만 그 가옥이 지금은 개발지역에 포함되어 있어 존립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합덕 봉기 역시 고부농민봉기보다 빠른 시기에 일어났지만 민란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분명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던 동학과 합덕봉기는 연관성이 있다.

● 시기적으로 가장 빠른 ‘합덕봉기’ 사건을 알고 싶다. 지역민도 극히 일부만 합덕농민봉기라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사실 관계부터 확인하자. 
합덕농민봉기가 일어난 것은 1893년 12월 14일로 고부농민봉기 보다 26일이나 빨랐다. 합덕농민봉기의 원인은 전 전라병사이던 이정규의 탐학에서 비롯되었다. 전 병사 이정규는 벼슬에서 물러난 이후 합덕 연제수리계장을 하면서 합덕 농민들을 착취하고 수탈하였다. 이정규의 탐학에 견디다 못한 합덕농민들은 이정규를 고발하는 혈원록을 작성하여 홍주목사에게 제출했다. 하지만 홍주목사가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이정규가 합덕농민들을 죽이라는 편지를 홍주목사에게 전하려 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날 밤 7개 마을 합덕농민이 모여 이정규와 가솔들의 집을 불살랐다. 이렇게 시작된 합덕농민봉기는 충청감영을 통해 조정에 알려졌다. 그 결과 이정규는 유배되었으며 농민 책임자로 지목된 나성뢰는 함경도 이원으로 유배됐다.
 
● 소위 민란과 같은 것 아닌가? 동학농민혁명과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표면적으로 나타난 것은 말한 바와 같지만 합덕농민봉기가 내포지방 동학농민봉기와 어떻게 관련이 된 것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표면적으로 합덕농민봉기를 살필 것이 아니라 동학농민봉기를 둘러싼 19세기 후반의 동학농민혁명 전야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거시적 측면에서 합덕농민봉기를 살펴보면 합덕농민혁명이 내포지방 동학농민혁명의 시원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조선조정의 탄압으로 침체해 있던 동학이 역사의 전면에 재등장한 것은 1892년 공주취회였다. 공주취회의 목적은 교조인 최제우 대선생의 억울한 죽음을 사면해 달라는 탄원서를 충청감사에게 전달하는 것인데,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교조신원운동’이다. 공주취회의 결과 충청감사 조병식은 각 군현에 감결을 내려 동학교도에 대한 이유 없는 탄압을 중단하도록 했다.
탄압중단이라는 큰 성과를 얻어 내자 자신감을 얻은 동학교도들은 연이어 광화문 복합상소와 보은취회를 열어 더 큰 규모로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였다. 보은취회에서는 동학과 관련된 요구는 자제하고 농민들이 고통 받고 있는 불평등과 차별철폐를 주장하면서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자는 보국안민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주장을 하였다. 그 결과 조선의 많은 농민들은 자신이 안고 있는 불평등과 차별해소를 위해 동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대거 동학에 입도하게 되었다. 이때가 바로 1893년의 일이다. 합덕농민봉기는 바로 이런 시점에서 벌어진 일로 봉기를 일으킨 합덕농민들이 동학과 관련이 있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 합덕봉기에 참여한 농민들 중에 동학교도가 많았기 때문에 동학관련 사건이라는 것인가? 동학사에 편입되기엔 약한 개연성 아닌가?
합덕농민봉기가 동학과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사실로 증명된다. 당시 합덕농민을 대표했던 인물로 나성뢰, 이영택, 방재성, 김윤필 등이 거론되는데 합덕농민항쟁에 관해 충청감사 조병식이 조정에 올린 장계에는 나성뢰, 방재성, 김윤필 등이 엄한 벌을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그 중 나성뢰는 1894년 8월 홍주목사 이승우가 내포지방 동학접주들을 불러 윤음을 내렸는데 이때 참여한 동학접주로 나성뢰가 나온다. 이것으로 보아 나성뢰는 합덕을 대표하는 동학접주였음이 명확하다. 합덕의 농민들을 조직하는 매개가 바로 동학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는 사건은 또 있다. 합덕봉기가 일어 난 후 1년이 채 되지 않은 시기이자 동학농민혁명 기간인 1894년 10월16일부터 21일까지 합덕에서는 큰 전투가 벌어졌다. 동학농민군이 합덕 소들성에 주둔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자 홍주에서 관군을 보내 합덕 성동성에 주둔하면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홍주관군은 우세한 무기로 농민군을 공격했지만 농민군을 쉽게 무너뜨리지 못했다. 그러자 수차례 군사와 무기를 보낸 후 가까스로 농민군을 이길 수 있었다. 이렇게 동학농민혁명 기간 중 합덕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던 것은 직전 벌어진 1893년 합덕농민봉기가 동학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음을 방증한다. 합덕농민봉기는 동학접주 나성뢰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농민봉기였음을 확인할 수 있고, 합덕농민봉기가 내포지방 동학농민혁명의 기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 합덕에서 농민들의 봉기가 동학농민혁명 이전에 한번, 동학농민혁명 기간에 한번 총 두 차례 일어난 것인가? 
전라도 지방에서 동학농민군의 기포가 본격화되었던 시점인 1894년 3월 26일에 합덕농민 수백명이 덕산관아를 점령한 일이 발생했다는 기록이 있다. 덕산군수가 합덕농민봉기에 대해 난민이라 규정하여 보고했다는 이유로 덕산관아를 점령한 합덕농민들은 덕산군수를 위협했는데 덕산군수는 좋은 말로 달래 봉변을 면했지만 관속이던 김일관은 심하게 구타를 당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합덕농민들이 덕산관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전라도지방에서 본격적으로 동학농민군이 봉기를 일으킨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합덕농민들이 농민봉기를 일으키고 덕산관아를 점령하여 관속을 구타한 사건은 내포지방 동학농민혁명의 최초 기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정리해보면 1893년 12월 말에 한 번, 1894년 3월에 봉기가 일어났다. 1894년 10월 16일 합덕전투는 정식으로 동학농민혁명 기간 중에 벌어진 전투였다. 사건으로 보면 3번이지만 1894년 3월의 일은 규모면에서 지금의 항의 방문 중에 일어난 폭행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내포지방 최초의 기포였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는 내포지방 동학농민들이 일으킨 최초의 기포를 1894년 4월 원벌기포로 보는데 실제로는 합덕농민들이 덕산관아를 점령한 것을 최초의 기포로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 일단 농민들이 가지고 있는 체제 불만을 동학을 통해서 조직화했다고 이해하겠다. 그렇다면 합덕 지역에 동학관련 유적지가 남아 있나? 합덕과 우강 지역은 천주교 관련 유적지만 알려져 있다.
합덕과 우강에는 천주교와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천주교와 관련된 유적 중에는 동학과 관련된 유적과 겹치는 부분이 많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현재의 합덕성당이다. 합덕성당 자리는 합덕농민봉기가 일어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바로 합덕성당 자리가 전 병사 이정규가 호화저택을 짓고 가솔들과 살던 곳이었다. 이곳을 합덕농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불태웠던 것이다. 또한 합덕성당 맞은편에 있는 소들성은 동학농민혁명 기간 중 합덕의 동학농민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합덕제 반대 방향에 있는 성동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홍주관군과 6일간 전투를 벌였는데 지금의 합덕읍 대합덕리 대호마을 뒤편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대호마을 뒤편에는 동학군의 시신을 묻은 동학묘가 있었는데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진행되면서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 조선 말 체제의 모순과 합덕이라는 지역적 특색과 연결되나?
내포지방은 외래 문물에 대해 거부감이 적고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힘이 큰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동학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것도 그런 이유였고, 천주교를 받아들인 것도 그런 연유가 있다. 하지만 천주교는 극소수에 의해 전파된 면이 있고, 동학은 전체적으로 수용되어 폭발적으로 분출된 측면이 있다.
합덕농민봉기와 동학농민혁명 기간 중 전개된 활동에는 합덕지방 농민들이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합덕과 우강의 넓은 들판에는 들판의 넓이만큼 농민들이 많았지만 조선사회의 사회적 모순 또한 집약되어 나타났다. 그 중 대표적으로 합덕제를 둘러싼 갈등이 표면화 된 것이다. 당진은 예로부터 해상교통이 발달한 지역으로 특성에 맞게 부재지주에 의한 착취와 수탈이 일상화 되고 있었다. 조선조정에서 직접 운영하는 궁방토와 조선 왕족과 양반들의 농장이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었고, 각 군현에서 조정에 바칠 공세미를 합덕, 우강, 신평 들판에 월경지를 두어 거두어 들였다. 조선시대 내내 이런 착취와 수탈이 일상화되고 있었던 지역이었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이 농민들이 안고 있던 모순을 동학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작권자 © 당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