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 화 /편집위원, 민속지리학 박사, 충청남도문화재전문위원, (사)당진향토문화연구소장

▲ 기지시리 전경 사진
기지시리는 1914년 3월 일제가 군현리를 통폐합하여 자생적인 마을자치활동을 통제하고 통치의 일사 분란함을 꾀하고자 행정개편으로 형성된 마을로 면천군 승선면 내기리(內機里)의 ‘機’와 부지동(釜池洞)의 ‘池’자를 따서 형성된 마을명이다.

즉 산능선 마을인 내기리와 대동샘이 있는 부지동 마을이 합쳐져 형성된 마을로 큰 산능선 아래 좋은 대동샘이 있는 곳을 상징한다. ‘틀못이’→‘틀모시’→‘틀무시’로 음운변화가 이루어지면서 한자화 과정에서 '틀'은 '機'로, '무'는 '池'로, '시'는 시장을 뜻하는 '市'로 변화했다.


기지시리는 1914년 3월 일제가 군현 및 각리를 통폐합하여 자생적인 마을자치활동을 통제하고 통치의 일사 분란함을 꾀하고자 일본인들이 행정개편을 단행하면서 통폐합한 대표적인 자연마을명의 앞 자를 각각 따서 각 리명(里名)을 붙여 리명은 어떤 특별한 의미가 없음을 쉽게 알 수 있는데 기지시리(機池市里)는 좀 특이하게도 기지장(機池場)의 지명을 그대로 따고 있다.


즉 기지시리가 행정구역명으로 최초로 등장하는 리명은 1917년 발간된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상)』에 송암면(松岩面)은 기지시리(機池市里), 내기리(內機里), 상가리(上佳里), 삽교리(揷橋里), 반소리(盤所里), 부지리(釜池里), 송산면(松山面) 파리(坡里) 각 일부라고 기록하고 있어 기지시가 처음으로 지방행정구역명으로 나타난다.


즉 일제가 우리나라 군면리(郡面里)를 통폐합하면서 형성된 행정구역명으로 김추윤은 『당나루의 맥락Ⅸ 지명편』과『당진군지』지명의 유래에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승선면 내기리(內機里), 부지동(釜池洞), 반소리(盤所里), 상가리(上佳里), 삽교리(揷橋里)의 각 일부와 송산면 장파리(長坡里) 일부를 병합하여 행정구역명을 기지시리라 하여 송악면에 편입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1912년 조선총독부의 『신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기지시리’가 빠져 있어 1917년 발간한『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상)』의 기지시리(機池市里)는 오기(誤記)로 일제가 1914년 지방행정개편을 하면서 형성된 리(里)인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지시는 이미 조선시대에 면천군 승선면 내기리(內機里)의 ‘機’와 부지동(釜池洞)의 ‘池’자를 따서 형성된 시장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산능선 마을인 내기리와 대동샘이 있는 부지동 마을이 합쳐져 형성된 마을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기지시 시장이 있는 구릉은 표고차가 약 50m에 불과하지만 등짐을 지고 기지시의 잿배기를 오르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


▲ 기지시리 능성(잿배기 모습)
기지장에서는 주로 한진 성구미 안섬 등지의 수산물과 순성인근 평야지대의 농산물이 교역되었다고 하며 특히 바닷물과 담수가 교차하는 곳으로 기지시리는 성구미·한진·안섬·오섬·영목 등에서 당진, 면천을 가려면 잿배기를 올라야 했다.


후에 신작로가 나고 버스가 다니면서 외지 사람들은 그 곳을 틀무시 고개라고도 했는데 국수봉까지 활모양으로 둥글게 돌아서는 산능선을 올라서야만 순성·신평·송산·송악·당진 어느 곳으로든 갈 수 있는 요로(要路)로 그 잿배기를 오르는 활모양의 능선이 바로 ‘논틀’, ‘밭틀’하는 ‘틀’을 뜻하는 ‘機’이고

현재 ‘샘건너 동네(공간아파트가 있는 곳)’라는 지명이 있는 장터 아래, 즉 활모양의 산능선 아래에 있던 대동샘을 뜻하는 ‘池’를 묶어 부르던 지명으로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큰 틀 아래 큰 가마 같은 대동샘, 즉 부지동(釜池洞) 샘을 뜻하는 ‘池’를 따서 불렀던 지명이었다.


이를 현재 전하는 마을 소지명으로 파악해 보면 기지시리에서 장이 서는 산능선 전후 전체는 장터(장이 섰던 곳)이고 그 산 능선 안의 마을을 ‘안틀못시’(면천군 당시 지명에 ‘內機’ 라 표기함)라고 하며 ‘연방측(連防側)’은 활모양의 산능선 그 아래 지역으로 ‘기지(機池)’는 ‘논둑 같은 큰 둑방 아래 대동샘이 있는 모양’을 뜻하며 이곳에 시장이 형성되어 ‘기지시(機池市)’라는 지명이 형성되었다.


이런 기지시의 지명을 잘못 해석함으로써 임동권과 이우영은 줄다리기 고증에 상당부분 오류를 범하고 있다.


즉 임동권은『한국민속문화론』에서 “機池市는 충남 당진군 송악면 기지시리로 속칭 ‘틀무시’, ‘틀모시’란 ‘틀못’의 와전에서 한자로 기지시라 적은 듯 ‘機’는 틀의 뜻이고 ‘池’는 ‘못’의 뜻에서 機池市라 표기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지시 마을 뒤 언덕 너머에는 큰 우물이 있었고 전설에 의하면 옛날 이 고장에는 방직업이 번창해서 각 가정에서 모시 길쌈을 많이 했는데, 이 우물에다 실꾸리를 담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우물의 수량이 풍부해서 지금은 기지시의 상수원이 되어 복개되어 못의 흔적은 없어지고 말았으나 10년 전까지만 해도 우물이라기보다는 20평쯤 되는 못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이우영은『機池市 줄다리기』에서 “기지시(틀못시)는 지형이 베틀 형국으로서 옥녀직금(玉女織錦)하는 형국이라 한다.

이를 다시 풀이하면 玉女가 베틀을 놓고 베짜는 형국이라 해서 베틀 기(機), 베를 짜는 데는 꾸리를 담그고 또는 짠 베를 담궈 우리고 하는 물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못 지(池) 해서 기지시라 명명된 것이라 하며, 市字는 시장을 뜻한다.”라 하였고

“서쪽에 대동샘 못이 있고 샘건너 동네가 있으며, 북쪽에 흥척골이 있어 줄다리기 관람하기가 편리하다. 그외 도구머리(도투머리) 부락이 있고 가세울(가위) 부락도 있다. 당골 또는 불당골은 절이 있었다가 폐사가 되어 불당골이라고도 하며 베를 짤 때 꾸리를 담아 좌우로 드나드는 북집을 말하는 지리설로 북당골이라고도 한다.” 또 “이곳 줄다리기하는 장소는 興尺골이라 한다.

지면이 평평하고 장방형이어서 아주 안성마춤이다.”라고 기록해 기지시(機池市) 지명을 잘못 뜻풀이함으로써 오는 오류, 즉 지세의 모양을 보고 형성된 우리말 ‘틀무시’, ‘틀못이’를 잘못 이해함으로서 줄다리기 고증에 오류를 범하고 있다.


기지시(機池市)는 지명이 순 우리말로는 ‘틀못이’에서 ‘틀모시’, ‘틀모시’에서 ‘틀무시’로 어음변화가 이루어지고, 이 지명이 한자화 되는 과정에서 훈차(訓借)된 것으로 틀못이의 틀은 ‘틀’, ‘베틀’을 뜻하는 ‘機’로, 틀못이의 ‘못’은 못을 뜻하는 ‘池’로 훈차한 것이다.


따라서 틀못이의 ‘機’를 한자 훈(訓)대로 잘못 뜻풀이를 하다 보니 임동권은 “옛날 이 고장에는 방직업이 번창해서 각 가정에서 모시 길쌈을 많이 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기지시장은 길쌈의 원료인 목화거래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827년경의 서유구의 만년 저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예규지(倪圭志) 권사(卷四) 팔역장시(八域場市)에 전국의 1,052개의 시장이 제시되며 기지장(機池場)에서 거래되는 물건은 요즉어염약애( )이라고 밝혀 붕어〔 〕, 소금, 약쑥〔藥艾〕이 풍부하다고 되어 있다.


또한 이 지역은 바닷가로 특별히 목화재배를 할 만한 여건이 되지 못하는데, 『한국 상업의 역사』에 전국 장시(場市) 중 거래상품을 밝힌 324개 향시소(鄕市所)의 주거래 물품인 곡물과 담배, 목화, 수공업제품 등이 기지시장에서는 매매되지 않고 있으며, 기지시장 곡물장이 형성된 것은 1939년부터 1950년대까지로 1939년부터 마강구, 김문식, 김동옥, 노영식에 의해 곡물장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우영도 베틀형국에 맞게 ‘흥척동’, ‘북당골’ 등의 지명을 새롭게 짓고 있다. 즉 1936년부터 현재의 줄다리기의 장소인 연방측으로 당시 면사무소에서 상수리 밭을 ‘흥겹게 자질한다는 뜻’의 흥척동으로, ‘부처님을 모시던 절이 있던 골짜기’라는 뜻의 ‘불당골’은 ‘북당골’로 변화되었다.


지명(地名)은 그 토지(土地)의 역사를 말하고 그곳의 지리(地理)를 말한다고 했듯이 지명은 오래전부터 그곳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의 생활상의 편의를 위해서 붙인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지명의 명명(命名)은 그 향토인(鄕土人)들이 즉흥적으로 붙인 것이 아니라 향토에 가장 적합하다고 여기는 인상(印象), 사상(事象), 역사적 유물(遺物), 전통(傳統) 등을 기준으로 붙인 것이므로 지명에는 조상들의 얼이 담겨 있다.


따라서 지명은 향토의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로 자의적(恣意的)인 해석(解釋)이나 변경(變更)은 삼가야 하며, 새로운 지명을 만들 때에도 향토(鄕土) 즉 그 지역의 자연(自然), 전통(傳統) 등을 고려해서 붙여야 한다.

따라서 지명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유산으로 그 속에는 역사, 전통, 문화, 풍속 등이 서려있고 그 지방 특유의 자연경관과 풍토와 생활모습이 용해되어 있다.
따라서 지명 유래(由來)는 조상들의 삶의 한 편모(片貌)이다.

▲ 부지동 대동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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