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 화(편집위원, 민속지리학 박사, 충청남도문화재전문위원, (사)당진향토문화연구소장)

▲ 송산의 진산(鎭山) 봉화산은 과거 창택산, 창덕산으로 불렸다.
봉화산은 ‘창택산’이라고도 하는데 이 산은 도문리, 삼월리, 유곡리로 이어지는 산으로 남쪽에서 이어져 오는 당진군 정미면 수당리 안국사지가 있는 안국산(봉화산)-고대면 고산봉-창택산으로 이어지는 봉수대가 있던 곳으로 이 산 아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편찬자인 이행(李荇)이 심었다는 회화나무가 있고 덕수이씨의 선산인 능안이 있는 곳이다.


송산면 지명은 상거리, 매곡리, 삼월리에 걸쳐 있는 높이 50m의 솔모양으로 생긴 소타뫼〔松山〕의 이름을 따서 송산면이라 하였다고도 전한다. 그런데 그 이름은 조선시대의 면천군 송산면이 있어 종종 오해가 생기는데, 현재의 송산면은 조선시대의 면천 송산면과는 전혀 범위가 달랐다.

현재 송산면은 조선시대 면천군 감천면과 창택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조선시대 면천군 송산면 22개 리와 면천군 감천면 10개리, 그리고 창택면 13개 리, 승선면의 서원리, 금학리 2개리와 당진군 동면의 항거리와 원당리 2개리를 병합하여 당진군 송산면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이때에 송산면 리 편제도 상거리, 부곡리, 매곡리, 송석리, 당산리, 금암리, 명산리, 도문리, 무수리, 삼월리, 동곡리, 유암리, 가곡리 등 13개리로 개편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능안 전경. 이 일대는 저명사족인 덕수이씨의 세거지이다.
송산면의 진산인 창택산(倉澤山), 즉 봉화산(烽火山)은 창택곶(倉澤串)의 중심에 자리잡은 산으로 대체로 지형이 작은 반도처럼 뾰족이 솟아나온 곳으로 아산만과 내륙을 연결한 탓에 포구와 창고, 그리고 목장 등의 시설이 있어 형성된 산명으로 확인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봉화 1곳으로 ‘창덕산(倉德山)'으로 표기되어 있고 동(東)으로 명해봉(明海烽), 서(西)로 당진 고산(高山) 준(准)한다고 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창택산(倉宅山)'이라고 표기되고 있고 봉수(烽燧) 서는 당진현 고산, 북은 경기도 양성현 괴태길곶(槐台吉串)과 응한다고 하였다.

그외 『여지도서(1859)』와 『충청도읍지』에 ‘창택산(倉擇山) 봉수'로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여지도서(輿地圖書)』나 『호서읍지(湖西邑誌)』(1871)에 ‘창택면'이라는 면명 표기는 없다. 이를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지 생각해 봐야 하는데, 이 지역은 아마도 계방촌(契房村)이거나 궁둔전(宮屯田) 또는 관둔전(官屯田)으로 간척지였던 것 같다.

그러기에 편제에서 누락된 경우로 ‘계방'이란 관가에서 토지대장이나 호적대장에서 마을을 아예 누락시키고 그곳에 부과할 세금을 공적인 경비로 충당하는 방식으로 마을의 존재를 소략하여 편제의 대상이 되지 않게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또 전설상으로 전해오는 것은 덕수이씨의 선산(先山)지역을 지칭하는 ‘능안'에서 그 답의 일부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창택산 일대는 저명사족인 덕수이씨와 인연이 많은 곳으로 조선시대 손꼽히는 사족가문인 덕수이씨의 세거지였다. 덕수이씨가 면천에 세거하게 된 것은 이의무(李宜武, 1449~1507)에 의해서다.

이의무가 홍주목사로 부임해 있을 때, 홍주진 관할인 면천군 감천면 창택리 장자동 능안이란 곳이 버드나무골(현 송산면 유곡리) 말목장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말목장을 순찰할 때마다 그곳을 지나갔다. 이의무는 능안의 산수가 수려함에 늘 감탄하며, “내가 살 곳도 이곳이고, 죽어지낼 곳도 이곳"이라 하며 창택리를 낙향지로 뜻을 두었음을 그의 아들 용재(容齋) 이행이 지은 부친의 행장에 기록하고 있다.


▲ 기록에 창택면에 대한 기록은 없고 송산면은 솔모양의 소타뫼라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중종때의 이행이 심었다는 회화나무)
유언에 따라 이의무의 묘는 창택리 봉화산 백주봉 능안에 장례하고 그의 아들 5형제가 차례로 등과하자 왕이 치제문을 내렸다. 특히 이행은 기묘사화를 겪은 후 고향인 면천으로 내려와 살면서 자신의 호를 ‘창택어수(滄澤漁叟)'라 지었으며 손자인 이필(李泌)은 능성구씨와 혼인하여 세거의 기반을 다졌다.

그리고 훗날 명산리 서원머리에 1706년(숙종 32)에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을 배향한 동악서원이 건립되기도 하였다. 창택산 일대는 이들의 농경지가 넓게 분포되었다. 동악 이안눌의 문집인 『동악집(1640)』에는 ‘창택리'라고만 되어 있으나 창택리와 주변 일대가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안눌은 종형 이안인(李安仁)이 창택의 농경지인 면천 창택리에 농막을 지은 것에 대한 감회를 추억하는 시를 읊기도 하였다.
이 인근에 전해오는 전설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능안
덕순이씨종중집행위원회 이재인의 「능안 전기」에 보면 옥녀봉과 봉화산 기슭에 자리한 능안은 천지인(天地人) 3혈중 인혈(人穴)로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으로 만대영화를 누릴 땅이라 한다.


원래 면천 창택(凔澤)(현재 송산면 삼월리와 도문리를 일컬음)에는 명당이 있다고 하여 나라에서는 풍수지리의 명사를 보내 왕릉자리를 찾게 하였으므로 왕명을 받아 송악면 기지시리에 와서 동편에 있는 국사봉에 올라 산세를 두루 관찰한 뒤에 산세를 따라 송악면 도문리 백주봉 동편에 이르니 이 곳이 왕릉자리였다 한다.


그러나 능안이라는 지명과 같이 능자리가 아니라는 뜻으로 일설에는 당대 풍수명사 박상의(朴相宜)는 덕순이씨 이안인(李安仁)과 절친한 사이었던 바 창택의 명당자리를 발견하였으나 이곳은 이미 덕순이씨 묘역으로 정해져 있어서 산도(山圖)를 그릴 때 북쪽으로 건해풍(乾海風)이 불어오고 바다가 보이는 명당임을 알면서도 은폐하기 위하여 북쪽에 울창한 숲이 있어 건해풍을 막는 그림을 그려 왕릉자리가 아니라는 명분을 만들었다 한다.


이에 해당하는 전설이 있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라에 상을 당하여 능으로 쓸만한 자리인가 확인하기 위해 이곳 도문리에 한 신하가 내려왔다. 그 지관이 내려와 보니 정말 능자리였다.


그런데 그는 덕순이씨들과 친분관계를 갖고 있었고 이미 덕순이씨들이 묘자리를 잡고 있던 터라 좋은 묘안을 찾아내야 했다. 그래 상감께 보고하길 “능안입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능안이란 말이 바깥과 안을 말하는 안으로 능안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이 곳은 능의 자리가 아니라고 해석할 수 있으므로 “능안입니다.” 하니 “능이 아니야? 그럼 틀렸고만.” 그래서 덕순이씨의 묘자리를 보존했다고 한다.

② 토성
이의무가 홍주목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송산면 유곡리의 토성에 사냥하러 왔다.
이 토성은 양편이 갯고랑이고 안쪽을 높이 쌓은 곳으로, 이의무가 사냥을 왔다가 자신이 묻힐 곳을 정하고 돌아가면서 같이 따라온 사람에게 송산중학교자리로 묘자리를 잡아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③ 지네형국과 뱀형국
봉화산(봉우산) 자락으로 자리한 송산은 뱀형국으로 뱀이 많았고, 송학산 자락의 송악은 지네형국으로 지네와 뱀이 격돌하는 형국이다. 이 마을들이 석전을 해 송악의 지네가 넘어 오지 못하게 하여 뱀에게 졌다고 한다.

④ 꿩배산
송산면 유곡리 버드나뭇재 북쪽에 경치가 좋은 산이 있는데 이 산봉우리에는 잔디가 쫙 깔려 있어 꿩배산이라 불리어진다. 전설에 의하면 그 동네에 청년이 한명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나무를 하러 산중턱을 지나려니까 아이들이 모여 앉아 꿩 한 마리를 구워 가지고 막 먹으려고 하는 중이었다. 그 광경을 본 나무꾼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자기보다도 어린 아이들 보고 차마 달라고 할 수도 없고 달라고 해 봐야 또 주지 않을 것 같아 한 가지 꾀를 내게 되었다.


그는 아이들한테 점잖게 말을 건넸다.
“얘들아, 여기가 어느 산인지 너희도 알지. 여기에서는 그런 것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야. 그러니까 그 꿩을 내가 먼저 먹어보고 괜찮거든 너희들이 먹으렴.”
그러니까 정직한 아이들은 쾌히 승낙을 했다.


나무꾼은 구워놓은 꿩고기를 한 점 떼어 먹어보니까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이 그만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구운 꿩을 한손으로 들고 꿔그덕 프드득 꿔그덕 프드득 거리고 때굴때굴 뒹굴며 눈을 부릅뜨고 돌아다녔다.


이 모습을 옆에서 본 아이들은 겁이 나서 모두 도망쳐버렸다. 그러자 이 나무꾼은 구워놓은 꿩을 다 먹고는 나무 한 짐을 해 가지고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이 소문이 마을에 퍼져서 그 후부터는 그 산이 「꿩배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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