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운석 호서고1회 동창회장(단국대 명예교수)

송운석 호서고1회 동창회장(단국대 명예교수)
송운석 호서고1회 동창회장(단국대 명예교수)

작년, 오랜만에 나간 고교 동창회에서 동창들로부터 회장직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물론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계속 피해왔던 터라 이미 은퇴한 지 4년째 접어든 나로서 더 이상 이 역할을 사양할 마땅한 핑곗거리도 없었다. 

마지못해 회장 역할을 수락하면서 ‘70세 접어들어 같이 늙어가는 고교 동창들에게 봉사하라는 하늘의 명령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고교시절은 시골에서 처음 문을 연 신설 고등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언덕 위에 2층짜리 시멘트 건물 한 동이 학교시설의 전부였고, 학급 수는 2개 반으로 남녀가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받았다. 학생 수는 100여명 남짓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3년간 같은 교실에서 함께 지내면서 청소년 시절의 많은 고민과 꿈 그리고 열악한 환경으로 인한 고통을 공유하면서 고교 학창 시절을 보냈다. 이왕 회장직을 맡은 이상 동창들을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으면 그것도 보람이 아니겠는가 생각했다. 이를 위해 먼저 그동안 코로나에 막혀 실행하지 못한 졸업 50주년 수학여행을 다시 추진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몇몇 친구들과 상의했다. 장소는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갔던 설악산 1박 2일 코스였다. 

약 2개월 남짓 여행을 계획하고 추진하면서 집행부 친구들의 마음은 들떠 있었다. 그들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정말 기억에 남는 행복한 여행을 친구들에게 선물할까였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자기 가슴에 사랑이 꽃피듯,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고민할 때 가슴에 행복감이 피어오름을 실감했다. 

우리는 카톡방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서너 차례 직접 만나서 여행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까지 서로 나누고 꼼꼼하게 준비했다. 많은 친구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그동안 졸업 후 한 번도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들까지도 연락을 취했다. 통화를 할 때는 설래임 반 우려 반이었다. 혹시 나이 들어 아프지는 않은지, 집안은 편안한지 궁금했다. 대부분 친구는 하나 같이 반겨주고 고마워했다. 동창들과 함께 고등학교 시절의 수학여행을 의미 있게 재현해 보자는 간절한 마음이 통했던 것 같다. 

여행 준비는 집행부 친구들이 각자 역할을 맡아 진행되었다. 나는 그들의 정성에 다시 한번 감동하였다. 간식을 담당한 친구는 1970년대 유행하던 간식거리를 찾아 수없이 인터넷을 뒤져 당시에 유행하던 크림빵, 라면땅, 껌, 칠성사이다, 알사탕 등으로 추억의 간식 봉지를 만들었다. 

과일을 담당한 친구는 조금이라도 맛있고 신선한 과일을 준비하고 싶어 십여 곳 이상의 과일가게를 들려 맛을 보고 가장 맛있는 과일을 사서 일일이 씻어 포장했다. 기념품을 담당한 친구, 회계를 맡은 친구 그리고 사회를 맡은 친구 모두들 정성으로 준비하고 힘을 보태었다. 

우리들의 준비는 이렇게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정성을 다하는 마음의 토대에서 이루어졌다. 그 결과 예상 외로 많은 친구들이 함께했고, 심지어 참석하지 못하는 친구들은 여행비와 함께 찬조금까지 보내왔다. 아울러 총동창회 및 재경 동창회를 이끄는 후배들까지도 1회 선배들의 수학여행을 축하하기 위해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서울서 설악산까지 관광버스로 가는 동안 각자 소개와 준비된 오락프로그램으로 언제 도착했는지 모르게 도착했다. 수십 번 오간 길이지만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한 것은 처음이다. 먼 길을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친한 친구와 함께 즐겁게 가는 것이라는 옛말이 거짓이 아님을 실감했다. 설악산 도착 후 간단한 등반으로 이어졌다. 

친구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마치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듯이 함께 사진 찍고, 일부는 초봄의 설악동 맑은 기운 속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언뜻 어느 책에서 읽은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언제든 허니문에서 느끼는 행복한 상태를 창조해 낼 수 있다’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며, 마음에는 열정과 설렘 그리고 육체적으로는 활기찬 기운을 느끼면 우리는 언제든 허니문의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바로 그런 행복감을 느끼고 함께 공유했는지 모른다.

우리들의 수학여행은 하이라이트인 저녁 식사 시간으로 이어졌다. 조촐하게 동명항의 횟집에서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들을 기리는 묵념 이후 교가 제창이 이어졌다. “강산도 아름답다 정든 내 고향~~”으로 이어지는 반 백 년 만에 불러보는 교가다. 우렁차게 식당에 울려 퍼지는 교가 소리는 모두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함께 기울이는 소주잔에 취기가 더해지며 웃음소리도 커졌다. 이제 우리 나이 70이니 앞으로 몇 년 후에 이런 자리를 다시 만든다고 해도 과연 여기 함께하는 모든 친구가 다시 모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몇몇 친구들은 걸음걸이가 불편하여 제대로 걷지 못했고, 두주불사하던 친구가 멍하니 술잔을 바라보면서 쓴웃음을 지고 앉아 있음을 보면서 이중의 누군가에게는 고교 시절의 추억을 나누는 인생의 마지막 자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식사가 끝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노래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흥겨운 음악 소리로 여흥이 한참 익어갈 무렵 걸음걸이가 불편하고 건강이 좋아 보이지 않은 친구가 내 귀에 속삭였다. ‘나도 노래 한마디 하고 싶네.’ 젊을 때는 제법 노래방도 자주 다니고 술도 꽤 즐겼던 친구인데 몸이 불편한 후 마이크를 한 번도 잡아 보지 못한 모양이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쓰려질 듯 휘청거리며 자기의 애창곡 ‘외나무다리’를 불렀다. “그리운 내 사랑아 지금은 어디~~ 새파란 가슴속에 간직한 꿈을~~”그의 노래를 들으며 그 친구는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할까 하는 생각으로 가슴이 짠했다. 그리고 왜 먼 지역에 살면서 새벽에 택시를 타고 출발장소로 단숨에 달려왔는지 조금은 알 듯했다. 

다음날 아침 식사 후 간단하게 산책을 마치고 우리는 낙산사로 향했다. 낙산사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산 위에 우뚝 선 관음상 앞에 발걸음이 멈추었다. 나는 큰 초를 하나 사서 거기에 ’우리 호서고 1회 동창 모두의 건강과 행운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라는 글귀를 써 축원 촛대에 꽂고 정성을 다해 삼배를 올렸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50 평생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내가 나온 고등학교에 대해 자부심을 느껴본 적이 없다. 명문고를 나오는 것은 여러모로 우리 사회에서 활동하는 동안 도움이 된다. 나의 고교 동창들은 나의 사회생활에 도움을 줄 만큼 사회에서 큰 역할을 하거나 재력을 갖추 친구가 없다. 

시골에서 택시 운전, 작은 구멍가게 혹은 학교 선생님을 하며 지낸 생활인들이다. 하지만 이번 70세에 다시 떠난 수학여행을 통해 그들로부터 순수한 정, 배려심 그리고 서로를 아끼는 마음에 흠뻑 젖을 수 있었다. 50년을 돌아 다시 그들과 함께 하면서 내가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참된 인간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진정한 명문 고교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동안 고등학교 졸업 후 평생 찾아 헤매던 파랑새가 3년 동안 한 교실에서 뒹굴며 자란 우리 고교 동창들 속에 있었다는 생각이 내 머리에 스쳤다. 늦게 남아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돌아보고 이미 나는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으로 의미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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