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달 기획2]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 어제 일처럼 생생”
[호국보훈의달 기획2]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 어제 일처럼 생생”
  • 김정훈 미디어팀장
  • 승인 2022.06.18 13:00
  • 호수 14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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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6·25 참전유공자회 당진시지회

[당진신문=김정훈 미디어팀장] 6월에는 대한민국에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날들이 많이 있다. 6월 1일은 의병의 역사적 가치를 일깨우는 의병의 날, 6월 6일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신 호국영령을 위한 현충일, 6월 25일은 대한민국의 가장 아픈 상처인 한국전쟁이 발발한 날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로 흔히들 ‘6월을 호국보훈의 달’이라고 한다.

호국(護國) 보훈(報勳) 즉 나라를 지키고 나라를 위하여 힘쓴 사람들의 공훈에 보답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과연 얼마나 그분들의 공훈에 대해 보답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 당진신문은 ‘호국 보훈의 달’인 6월을 맞아 나라를 위해 애쓰신 분들을 찾아가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신 그분들에게 들어보는 그때의 얘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6·25 전쟁 72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6·25 참전유공자회 당진시지회를 찾았다. 때마침 72주년 행사 준비를 위한 참전유공자들의 모임이 있었고, 우리나라에서 6·25 전쟁이 발발한 지 벌써 70여년이 지나 20대 초반에 전쟁을 겪었던 이분들은 지금 아흔을 훌쩍 넘겼지만, 그때 당시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테러, 고문..통제 안된 포로수용소

대한민국 6·25 참전유공자회 당진시지회 최성재 지회장은 6·25 당시 헌병으로 논산의 제6 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 관리를 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조선인민군 15만, 중공군 2만 등 17만에 달하는 적군 포로가 수용되어 있었지만, 포로수용소 내부는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최성재 지회장에 따르면 수천 명 단위로 수용된 개별 수용소 안쪽은 통제가 어려운 무법천지로 포로조직을 중심으로 사상 교육과 조선인민군 군사 훈련까지 행해지고 있었고, ‘공산포로’들은 다수의 ‘반공포로’들에게 테러와 고문, 살해 등을 통한 회유 공작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산군 포로 중 공산주의 국가에 송환되는 것을 반대하는 ‘반공포로'의 수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치였다. 이게 문제가 된 건 남한에서 강제로 입대한 북한군이 상당히 많았고, 당장 공산화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중국과 북한에서 내심 공산주의에 반감이 있다가 징집되어서 포로가 된 뒤 반공주의를 드러낸 사례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송환거부를 한 반공포로를 관리했다는 최성재 지회장은 “논산에서 반공 포로의 수가 약 3만명 정도 됐는데 거제도에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와서인지 이곳에서는 꽤 친절하고 말도 잘 들었고 상당히 적극적 이었다”고 말했다.

“학도의용군으로 내 목숨을 걸었다” 

고1때 교복에 교모를 착용하고 전쟁에 참여 했다는 송인학 유공자는 학도의용군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북한군에 비해 병력이 많이 부족한 상황이었던 때라 어린 중학생 소년에서 장성한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학도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실전에 참여했다.

학도의용군은 6·25전쟁의 전 기간을 통해 모두 2만7700여 명에 이르렀고, 후방지역 또는 수복지역에서 선무활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무려 2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개별적으로 현지 입대를 지원하여 국군 정규 부대의 장병으로 참전하는 학도들이 줄을 이었으며, 상당수의 여학생들도 간호사로 출정했다.

특히, 학도의용군들은 계급도 군번도 없이 우리나라 전쟁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낙동강 방어선의 최대 요충지이던 포항에서의 공방전은 후에 영화로도 나오는 등 학도의용군의 대표적인 전공으로 꼽기도 한다.

“중공군의 피리소리가 무서웠다”

20세에 소집영장을 받고 전쟁에 참여한 조국형 유공자(91세)는 일반 병으로 입대를 했다가 선배의 권유로 하사관 교육을 받았다. 당시 제주도의 하사관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수료 후 부산의 동래구청에 모였는데 부산 사람들이 “마른 명태들이 또 나온다”며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고.

조국형 유공자는 “당시에는 교육생들이 먹을 것도 없었지만 훈련도 힘들었고 이제 전방으로 가야 하니 그 사람들이 우리를 불쌍하게 생각했다”며 “이어서 우리가 흔히 들어 알고 있는 백마고지에 도착해 최전방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백마고지는 6·25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10일 동안의 전투기간 동안 고지의 주인이 무려 12번이나 바뀔 정도로 치열했다. 이 전투로 중공군은 1만 4000여 명의 사상자를, 한국군 3396명의 사상자를 냈다. 특히 이 전쟁에서 중공군이 진격을 할 때면 피리를 불며 진격했다는 이야기는 책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조국형 유공자는 “그때는 중공군의 피리 소리가 들리면 어김없이 전투가 발생했고, 고지의 주인이 바뀌어야 전투가 끝났다”며 “중공군의 피리 소리가 너무 무서웠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쫓기는 전쟁과 쫓아가는 전쟁은 다르다”

17세에 대덕리에 살다가 입대를 한 허병식 유공자는 “배낭 하나 들고 가끔 지급되던 소금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서울을 지나 의정부를 거쳐 동두천까지 갔다”며 “특히 서울을 지날 때는 한강 다리가 폭파되어 없어져서 한강 상류 쪽에서 낡은 배를 이용해 간신히 한강을 건넜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허병식 유공자에 따르면 동두천 역에서 매복해 있던 인민군들이 열차를 포위하고 사방에서 사격을 해대는 통에 결국 25연대는 그곳에서 대부분의 군인들이 전사를 했다. 허병식 유공자 또한 등과 다리에 총상을 입고 구사일생으로 그 곳을 빠져 나왔다. 이후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한데 섞여서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

허병식 유공자는 “당진에서 함께 갔던 동료들의 대부분이 전사를 했다. 십여 년 전 당진에서 우연히 25연대 출신의 동기를 만났지만, 그 사람도 총탄이 몸 안에 박혀 있는 채로 살아오다 결국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며 아쉬워했다. 

허병식 유공자가 회상하는 북한의 인민군은 “전쟁중이었어도 인민군이나 우리나 똑같았다. 그래도 죽음의 고비에서 살아났다는 것을 인민군들도 알았는지 피난 때는 서로 챙겨 주기도 했었다”며 “쫓기는 전쟁과 쫓아가는 전쟁은 다르다. 결국 서로 쫓고 쫓기던 관계가 휴전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결국 서로 깊은 아픔을 간직한 전쟁 이었다”고 얘기를 마무리 했다.

유공자에 대한 예우는 우리의 자존심

나라를 위해 희생한 유공자들에 대한 예우는 결국 우리의 자존심이다. 외국의 경우 전쟁에 참전을 하거나 전사를 한 군인에 대한 예우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다. 그것은 결코 그 나라의 복지가 좋다기 보다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유공자분들과의 대화를 이어나가기 이전 공통된 의견은 “이 얘기 거짓말 같지?” 라는 말이었다. 아흔이 넘은 유공자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이 얘기들은 우리가 알던 내용보다 더 참혹하기만 하다. 

당진에서 6·25 전쟁에 참전했던 유공자의 수는 4115명이나 된다. 그 중 908명의 전사자가 있었고, 수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고 생사의 기로에 있었다. 

현재 당진시에 남아있는 6·25 참전 유공자는 약 250여 분이며 아흔을 넘기신 이들이 대부분이다. 현재 국가유공자가 한 달에 수령 하는 유공수당이 25만원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당진시에서도 그분들을 위한 예우가 있기는 하지만, 이 분들이 전쟁에 나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데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고 본다. 

현실적인 부분에서 그 분들을 위한 유공수당을 좀 더 높이는 것이 나라를 위해 몸 바치신 유공자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