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숙 당진수필문학회 

한현숙 당진수필문학회 ⓒ당진신문
한현숙 당진수필문학회 ⓒ당진신문

어릴 적 안방엔 자개장롱이 있었다. 까만 바탕에 소나무와 학이 새겨져 있고 모란꽃과 사슴이 새겨져 있는 신비한 농이었다. 한겨울 밤에 자다가 깨곤 할 때면 창호지 사이로 비추는 은은한 달빛을 받아 모란꽃이 살포시 피어나 고혹한 빛을 내곤 했다. 한여름 꼬리가 긴 햇볕이 방안 깊숙이 머물다 갈 때면 숨죽이고 있던 자개문양들이 오색영롱한 빛을 자아내며 빛의 판타지를 연출하곤 했다. 

방송에서 고려나전경함을 봤다. 꽃잎을 수놓은 자개조각들이 천연색으로 빛났다. 출연자들이 나무상자에 피어난 수백송이 모란꽃에 흠뻑 빠져 감탄을 쏟아내고 있다. 옻칠한 나무상자에는 화려하고 풍염한 모란당초무늬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피어있다. 넝쿨 줄기와 무늬 사이의 경계에 은, 동, 주석으로 선을 장식한 세밀함이 뛰어나 가히 귀한 국보급 보물이었다. 

화려함의 격조가 빼어난 나전칠기 작품을 보는 순간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반딧불이 빛처럼 은은한 색채로 신비로움을 더하기도 하고 영롱함과 오묘함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늘과 땅 바다가 빚어낸 사계절 스펙트럼을 덧입은 조개껍질과 전복껍질의 색이 시간과 빛의 각도에 따라 고색창연한 빛을 발하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빛을 머금은 옻칠 또한 때로는 차가운 빛을 때론 따뜻한 빛을 발하고 있다.

현존하는 고려나전경함의 수는 전 세계에 단 9점뿐이라 한다. 수십억을 호가하는 나전경함은 민족의 수난사와 맥을 함께했다. 일제강점기에 약탈된 것으로 보이는 고려 경함 9점 중 5점이 일본에 있다. 나머지 세 점 또한 일본을 통해 영국, 미국, 네덜란드 등지로 반출되었다. 

나전칠기는 당나라 때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삼국시대부터 나전칠기가 제작되기 시작해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독자적인 양식을 이룩했다. 조선시대에는 생활용품과 나전칠기가 만나 삶속에 자리했다.

어릴 적에만 해도 혼수품목 일위는 자개장이었다. 주거환경이 바뀌면서 집집마다 있던 자개장들은 처지 곤란한 물건이 되어 동네 공터에 버려지는 것이 현실이다. 전통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고 편리함을 쫓아 사는 우리와 달리 나전칠기와 옻칠기법을 전수받기 위한 세계인들이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빌게이츠는 나전 명인의 작품 전시회에서 나전의 아름다움에 반해 일 억 원 상당의 자개문양을 새겨 넣은 가정용 게임기를 만들어 가까운 사람들에게 선물을 했다.

스티브 잡스 또한 나전 장식의 휴대전화 케이스를 주문해 갔다. BMW에선 신차를 출시하며 나전으로 실내장식을 한다. 샤넬 또한 나전을 모티브로 세련된 패션쇼를 선보이며 각계각층의 세계인들의 나전애 대한 무한사랑의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주거환경의 변화 속에 다른 집기들과의 조화를 이루려면 검은색으로 일변의 전통 자개장은 외면 받았던 것이 현실이다.

김영준 명인은 전통 예술로만 치부하고 서민들의 삶속에서 멀어져 가던 나전칠기를 새롭게 재구성해 현대화 시키는데 앞 장 서고 있다. 김치냉장고, 휴대폰, 화장품 최고급 케이스, 호텔 욕실, 유람선, 요트, 항공기 일등석 등 다양한 분야에 나전칠기를 접목해 활용되고 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명동 성당 미사를 집전했을 때 사용한 의자에도 로마교황청의 주문에 의해 전통 옷 칠과 자개장식을 달아 만들었다. 

한지에 옻칠하고 삼각형 조개껍데기를 적절히 배치해 꽃과 벌레들의 생명력을 담은 ‘초충도’와 불특정 자개 조각들을 2~3㎜의 끊음질 기법으로 만든 나전 회화 작품회화만큼의 다양한 색깔의 벽걸이 장식과 상감 기법의 항아리 장식까지 모두 색을 입힌 여러 종류의 조개껍질로 기존과는 전혀 다른 색감을 선보이고 있다.  전통예술과 현대예술의 만남으로 실생활에서 멀게 느껴지던 고유한 문화가 새로운 매력으로 무궁무진한 가능성으로 세계 속에 뻗어 나가고 있다.

전통기법은 하루아침에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빛을 낼 수 없지만 태양빛을 온 몸으로 승화시켜 빛을 반사하는 달처럼. 스스로의 빛을 끌어내 빛을 전하는 별처럼. 전통기법은 신성한 우주에 숨결이 달빛, 별빛을 만나 장인의 손길에 문화 예술로 태어난 것은 아닐까. 수천 년을 이어온 전통 기법을 우리의 편리에 의해 외면하고 소홀히 한다면 선조들이 피와 땀이 서린 수천 년의 문화유산을 다시금 남에게 빼앗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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