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강정의

이 글은 고대면 출신의 칼럼니스트인  강정의 법사가 깨달음에 대해 조명해보려고 한 글이다. 평소 삶의 진솔한 문제들에 대해 합리적이면서 철학적인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서울교보문고에서 선정한 이달의 눈에 띄는 책 120가지 교육클리닉과 근래에는 <허허 참 속으며 사는줄을 모른다>라는 일상생활에서 깨달음의 생활을 모색한 책을 냈다. 당진중학교(8회)와 고려대학교교육 대학원을 나왔으며 초등학교 교장 퇴임 후 서울에서 참선과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당진신문=강정의]

다음에 제시한 깨달음에 대한 열 가지의 시험 문제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사는것이 참된 행복인가? 라는 화두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천착(穿鑿)해 보려는 생각들이라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정답이 없는것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정답이 있습니다. 정답이 없다는 말은 사람마다 자신의 답이 맞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답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정답이 있다는 말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의 답이 있다는 말입니다. 어떠한 답도 틀린 답은 없습니다.

다만 바른 답이 아닌 답일 뿐입니다. 바른답은 진리를 깨달은 자신의 업(業)을 비운 마음에서 나올 수가 있습니다. 업이란 중생심(衆 生心)을 말하며 중생심을 비우면 마음이 편하고 누구나 다 깨달은 사람이 될 수가 있다는게 오래전 깨닫고 사시다가 가신 여래(如來)의 가르침입니다.

글을 읽어보시면 그 안에 답을 찾는데 도움이 되는 길들이 있을것이라 봅니다. 다음 문항에 따라 각각 열자이내로 답을 써 보십시오.


1. 흔히 진리라는 말들을 하는데 진리란 무엇을 말하는가요?
2. 깨달음이란 무엇을 깨닫는다는 말 인가요?
3. 한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요?
4. 마음을 비우고 살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마음이 비워지는 것인가요?
5. 건강하게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하는가요?
6. 중도적인 생각과 지혜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요?
7. 죽음이 두렵지 않은 생사를 초월한 삶은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하는가요?
8. 자연의 섭리를 구체적으로 세가지만 써 보시오?
9. 죽을때 어떠한 한을 남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다가 죽어야 하는가요?
10. 날마다 행복한 날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써 보시오.


위의 문제는 하나이면서 열가지입니다. 답에 대한 채점은 누구한테 물어봐야 좋겠는가를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일미진중함시방(一味塵中含十方)입니다. 한 티끌속에 온 우주가 들어 있는 것처럼 한 문제의 답을 알면 열 문제의 답을 알 수 있다고 보면 좋겠습니다. 이 문제는 그냥 웃어넘길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넘기기에는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이라는 생각이듭니다.


“살다보니 별 시험문제가 다 있구먼요. 답을 쓰긴 썼는데 누구한테 채점을 해달라고 하지! 그게 문제네요. 이런 문제는 아무나보고 물어 볼수도 없고 참 답답합니다. 아하~ 그에게 내 답이 어떤지를 물어 보면 되겠네요”

“그게 누구요? 누구!”

“아~ 있어요”

“허허 참~ 그런 삶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물어볼 데가 있어서 좋겠소. 어떤 분인가요?”

“아이구 사람이 아니요”

“뭣이!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렇소. 자연의 섭리요. 다 덧없고 한때이며 꿈같이 변하는 자연의 섭리를 인격화한분이 내가 물어 볼 나의 스승이요"

“아! 그러하네요. 동감입니다. 지혜의 눈인 혜안으로 보면 모든 모습이 고정된  모습으로 보이는게 아니라 한때의 모습인 허상으로 보입니다. 자연의 이치인 섭리를 알아차리는게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허. 맞는 말입니다. 당신은 깨달음의 문인 진여문(眞如門)앞에 바짝  다가와 있습니다. 당신의 깨달음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어허라. 지금 내 앞에 아무런 문이 없는데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요?

“진리의 세계는 어떤 모습인 형상의 세계가 아니요. 이치의 세계요 마음의 세계이지요. 도의 세계가 진리의 세계입니다. 살아가면서 어렵고 곤란한 문제가 있을 때는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서 답을 찾는게 좋습니다. 진리를 깨달았다는 말은  자연의 섭리가 말해주는  말없는 말을 들을수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것은 변한다. 변하는 것은 다 인연에 따라 변한다> 좋은 인연을 만들어 주면 좋게 변하고, 좋지 않은 인연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 오는 인연법이 자연의 섭리요. 진여(眞如) 세계인 진리라는 법입니다. 진리의 세계는 찰라찰라 변함의 세계요. 또 항상 그렇고 그러한 여여(如如)한 세계입니다”


우주 만물 모두가 다 변하는 모습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삼라만상  모두가 다 진리가 현현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이란 중도(中道)의 공(空)함을 이해한 마음을 말합니다. 중도란 산술적인 중간이 아니고 있다. 없다. 길다. 짧다. 크다. 작다. 많다. 적다고하는 양변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것들은 다 인연에 따라 나타난 것들이기에 고정된 것이 없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즉是空 空卽是色)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볼 수있다는 이론을 말합니다.

성철스님은 생전에 백일법문에서 중도를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이란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삶과 죽음의 양변에 치우치지 않고 인연법인 중도적인 삶을 삽니다. 깨달은 사람은 인생이란 자연의 이치에 따라 찰라찰라 변하기에 나라고 하는 고정된 것이 없는 공(空)함을 깨닫고 무아(無我)와 무소유(無所有)의 생각을 갖고 살아갑니다.

모든 것은 변하니까 고정된 실체가 없는 가유(假有)의 존재라는게 공(空)함의 깨달음이요. 공함에서 깨닫게 되는게 무아(無我)와 무소유의 이론입니다. 무소유의 삶이란 소유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고 모든 것은 다 인연 따라 변하는 연기적인 것이기 때문에 고정된 것이 없는 공(空)하다는 것을 깨닫고 사는 삶을 말합니다. 공하다는 뜻은 무(無)라고하는 없다는 말이 아니고 모든 것은 변하는 존재이기에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공함을 깨닫고 나없는 나인 무아로 살면 삶에 집착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중도(中道), 공(空), 무소유(無所有), 연기(緣起), 변(變)함은 말은 달라도 그 의미는 같습니다. 깨달음의 가장 좋은 기회는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지켜보며 인생이 허망함을 느낄때입니다. 늘 죽음을 생각하고 허망함을 느낄 때 지혜가 나타납니다.

그 허망함이 허망하지 않고 그게 자연스럽다고 보면 허망함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자연의 세계는 곧 진리의 세계로 아주 공평한 변하는 이치의 세계입니다. 인과에 따른 변함에서 공평합니다. 어느 높은 사람이 길을 지나간다고 해서 자연의 나무들은 굽신거리지 않습니다. 집착과 욕심은  바로 어리석은 번뇌를 불러오게 하는 피뢰침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흔히 요즈음 구구팔팔 건강하게 살자는 말들을 하는데 육체가 건강해도 마음에 병이 들면 건강하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건강은 진리를 깨달은 지혜로운 마음을 말한다고 보면 좋겠습니다. 모든 것들이 다 덧없고 한때라는 생각 즉 지혜의 마음이 늘 자신의 마음속에 있을때 소소영영(昭昭靈靈)하다고 하여 늘 깨어있는 삶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지혜란 불교에서 보리심(菩提心)이라고 하며 자연의 섭리인 무상한 이치를 깨달은 마음을 말합니다. 주역의 핵심도 자연의 이치인 음양의 변함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데 있습니다.

자연의 섭리란 모든 것은 다 한때다 변한다 덧없다는 이치를 말합니다. 모든 것들이 다 변하는 이치가 진리인데 그 변함을 부정하거나 모르면 집착심을 내게 되며 그러한 마음을 무명(無明)또는 다른 말로 어리석음이라고 합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현상들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한때의 모습이라고 보는게 바로 보는 것이며 바로 보면 모든 것들이 다 한때의 모습으로 보게 됩니다. 바로 보는데서 즉 정견(正見)에서 바른 판단이 나옵니다.

바른 판단을 하며 살면 열반(涅槃)을 얻을 수가 있는데 이를 전문적인 용어로 택멸(擇滅)이라고 합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진정한 행복이란 어떤 것인가를 아는 바른 생각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잘사는 것이 중요한 것 이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가라는 바른 생각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잘못 보면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됩니다. 잘못된 자로 정확히 재면 그 결과는 정확히 틀립니다. 다 변하고 부질없는 것들에 욕심내고 집착을 하며 살지 않아야 겠다는게 깨달은 사람들의 살아가는 삶의 철학입니다.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갖 고있던 잘못된 어리석은 생각을 자각하고 바른 생각을 가저야 합니다.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롭다는 말은 어떤 것도 고정된 실체가 없고 다 그때그때 인연에 따라 변하는다는 이치를 깨달은 마음을 말합니다. 모든 것들이 무상하게 찰라찰라 변하는게 정상입니다. 사람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또 죽는게 정상입니다. 늙지 않으려면 젊어서 죽어야 하고 죽지 않는 방법은 태어나지 않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찰라찰라 변한다는 말은 순간순간 새로워 진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자연의 이치(섭리)를 깨달아 자연의 변하는 모습처럼 사는 삶을 깨달은 삶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비가 오면 오는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자연의 법대로 사는 사람을 순천자(順天者)라고 합니다. 깨달으면 삶과 죽음을 보는 생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범부(凡夫)들은 삶과 죽음을  단절된 생각으로 보는 분단생사(分段生死)관을 갖고 사는데 대해 깨달은 사람은 인생을 얼음이 물로 변하고 물이 증발하여 구름이 되는 것처럼 자연의 끊임없는 변함의 이치로 보는 변역생사(變易生死)관을 갖고 살아갑니다.

옛 중국의 장자(莊子)는 아내가 죽자 바가지를 엎어놓고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장자는 죽음을 계절이 바뀌는 자연스런 변화로 보는 변역생사관을 갖고 생사를 초월한 삶을 살았던 것을 짐작할 수가 있는 일화입니다.

삼라만상 모두는 자연의 섭리인 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진리의 당체(當體)들입니다. 진리가 어디 따로 있는게 아닙니다. 이제 글을 맺고자 합니다. 2500여년전에 이 땅에 오셔서 진리를 깨닫고 80세를 살다가 열반에 드신 부처님의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하니 약견(若見) 제상비상(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라-

“무릇 모습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니 만약에 모든 모습을 그렇게 본다면 바로 여래를 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래란 타타가타라고도 하며 부처를 말합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모습이 참 모습이 아니고 한때의 모습라는 것을  안다면 자신은 깨달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의 의미를 바로 이해한다는게 쉬운 것 같지만 어렵습니다. 구름(무명 즉 어리석음)이 걷히면 바로 밝은 햇빛이 낭요(朗曜)합니다. 어리석음을 자각하여  비우면 바로 지혜가 나타납니다. 어리석음과 지혜는 다 자신의 마음 안에  있어 자신의 생각대로 세상을 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한 사람은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음을 깨닫고 사는 살아있는 부처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분은 진실로 축하받을 일입니다.

몇일 전 필자는 대승불교연구원에서 6년여동안 가르침을 받았던 유식학의 최고 권위자이며 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장을 지내신 스승 오형근 박사님을 모시고 서울 종로에 있는 대원군의 사저였던 운현궁(雲峴宮)내를 둘러본 적이 있습니다. 구십을 넘긴 연세이지만 아주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운현궁에 들어서지마자 스승님의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하구먼”

모든 것들이 다 덧없다는 말씀이였습니다. 노 스승과 제자의 법담은 이어졌습니다.

“교수님은 평생 불교에 대해 공부를 하시는데 불교와 건강과의 관계가 있는지요?”

“허허. 강 법사 좋은 질문이네요. 불교는 육체에 대한 건강뿐만이 아니라 정신·사회적으로 유익한 건강법이 많이 있어요. 내가 그 덕을 보고 있는 것 같아요. 특히 불교는  욕심과 아만심을 비우고 늘 진리를 생각하는 지혜로 살라하고 죽음을 두렵게 생각하는 마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연의 이치에서 깨닫게 하고 마음 편히 사는 방법들을 깨우치게 하고 있어요. 묘관(妙觀:스승님이  필자에게 지어주신 호)선생은 내가 공부한 것을 전한 깨달음의 단계인 피부골수(皮肉骨髓)중 골수를 훔쳐갔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가세. 가세. 저 피안의 세계로 가세. 모두 가세. 깨달음을 이루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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