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면천면 영탑사 뒤편에 위치한 자연암벽, 의두암

[당진신문=이석준 수습기자] 당진 지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역사문화유적지가 많다. 예산이 투입돼 활발하게 복원되고 관리되는 곳들도 있으나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하는 역사문화유적지도 있다. 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지역의 소중한 자산인 당진의 역사문화유적지를 조명해보려 한다. 지역 내 역사·문화·유적지를 둘러보고, 그에 담긴 이야기를 소개한다.

의두암의 모습 정면에 의두암(依斗巖) 글자가 보인다
의두암의 모습 정면에 의두암(依斗巖) 글자가 보인다

통일신라 말 창건되어 천년고탑으로 불리는 유서 깊은 사찰 영탑사 뒤편에 위치한 의두암은 구한말 고위 관료이자 학자, 이름난 문장가인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과 인연이 깊다. 의두암이라는 이름 또한 김윤식이 직접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김윤식이 1887년 면천면 영탑사에 유배되었을 때 그를 찾아오는 선비들과 자주 의두암에 올라 시를 짓고 주연을 즐겼는데 김윤식은 의두암을 각별히 생각하여 1888년 7월 4일 두 명의 석공을 불러 벽면에 ‘의두암’이라 새겼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의두암에 올라 암벽을 찬찬히 살펴보면 하단부에는 ‘사람의 도리는 정직해야 한다’는 뜻의 인도정일(人道正一)과 중단부에 의두암(依斗巖)이라는 글자가 음각돼 있다. 

김윤식의 5년 6개월간 유배 생활을 기록한 면양행견일기(沔陽行遣日記) 의두암기(依斗巖記)에는 의두암의 모습과 그 이름을 지은 이유가 자세하게 적혀있다.

의두암의 전체 모습. 하단부에 인도정일(人道正一) 글자가 보인다.
의두암의 전체 모습. 하단부에 인도정일(人道正一) 글자가 보인다.

“상황산의 산기슭을 굽이굽이 이어져 동북쪽으로 가다가 다시 꺾여 남쪽으로 내려오면 활처럼 굽어져 있다가 솟아오른 봉우리가 있는데 이를 연화봉이라 한다. 봉을 따라 왼편으로 내려가 수십 보도 채 되지 않는 곳에 3층으로 된 석벽이 있는데 각층마다 몇 사람이 앉을 수 있다. 1층은 진의강, 2층은 적취대, 3층은 의두암이라 명명했다. 의두암 북쪽 몇 리쯤에 아미산과 다불산이 있다. 사람들이 이 두산 사이에 구름이 없으면 한양의 여러 산을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하였다. 나는 죄를 지어 남쪽으로 유배되어 영탑사에 임시로 거처하고 있으니 매양 한결같이 울적하고 무료하여 이 바위에 와서 앉아 유유작작하게 북쪽을 바라보며 항상 임금님의 품 안에서 의지하고자 이로써 이름을 지었다”

볕이 좋은 날에는 의두암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며 그날 행선지를 정하고, 그날 모인 선비들과 노복을 이끌고 유람을 즐기며 당진과 면천 일대 뛰어난 풍광과 지형의 빼어남을 찬미하기도 했다.

“...바닷물이 대진으로 들어와 서북쪽에서 동남쪽을 거쳐 띠처럼 빙 둘러 감싸 예산의 구만포에 이르고, 면천과 당진은 그 안에 감싸여 있어 실로 섬의 꼬리이다. 대진 서쪽은 큰물이 퍼져있어 경기와 해서의 수로와 통한다. 구만포 이남은 육지로 호서와 호남으로 이어지고 수많은 산들이 푸르게 주름져 있는데 그사이를 구름과 안개가 들락날락하였다...”

유배 온 중앙 관료의 눈에 이 지역의 풍속(風俗)은 어떻게 비춰졌을까? 김윤식의 일기를 살펴보면 이에 대한 몇 가지 흥미로운 기록들이 나타나 있다. 이중 대표적인 것을 한 가지 꼽자면 향촌 자치조직인 두레에 대한 기록이다.

“새벽에 창밖으로부터 징소리와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 창을 열고 바라보니 바로 촌민의 농악대였다... 3장 길이의 장대에 화룡기와 청령기 한쌍을 내세웠는데, 징, 북, 장고 따위의 악기들이 뒤섞여 연주되어 귀에 요란스러웠다... 신촌에서 깃발을 두 번 숙이면 우리 마을에서 깃발을 한번 숙여 답례를 한다. 두 마을이 함께 소란을 피우면서 마당을 둘러싼 채 북을 치면서 끝난다. 이런 풍속이 마을마다 있는데 두뢰(두레)라고 부르는 것으로, 옛날 미주의 풍속이 또한 이와 같았다. 술값을 나누어 주어 보내면 우리 마을의 백성들이 우리 집 두전의 잡초를 제거해준다”

두레는 농사일에 대한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조직되어 오랜 시간에 걸쳐 향촌 사회를 지배해온 마을 단위의 공동노동 조직이었다. 일반적으로 두레의 몰락은 향촌 사회의 몰락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당진시 남광현 문화재 팀장은 “기록에 묘사 된 당시 두레패의 공연장면을 보면 규모가 작지 않아 보인다. 이는 당시까지는 당진, 면천지역의 향촌자치가 살아있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의두암을 오르다 보면 칠층석탑(사진 왼쪽)이 보인다
의두암을 오르다 보면 칠층석탑(사진 왼쪽)이 보인다

김윤식이 당대의 풍속을 일기에 남겨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조선을 둘러싼 국내외 정세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의두암에 모인 선비들의 유유자적함과는 달리 당시 조선은 당백전 발행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이후 재정이 파산상태에 이르렀고 외국 열강에 철도, 산림, 광산채굴권 등 이권을 대부분 헐값에 팔아넘겼다.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부정부패는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켜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농촌의 붕괴는 가속화되어 농민들은 땅을 잃고 몰락하여 유랑하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김윤식은 매일 같이 의두암에 올라 유람에 몰두하며 혼란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으려 했던 것이 아닐까.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김윤식은 의두암에 대한 심경을 일기에 남겼다.

“이 산은 있은 때부터 바로 이 바위가 있었거늘 나보다 먼저 이 바위에 와서 놀던 사람들은 어찌 전에 그런 사람이 없었는가? 애석하도다. 이 빼어난 경치를 기록하고 이름을 새기는 것을 거론하지 않아 지금에 이르러서는 다 사라져 버렸으니 어찌 이 바위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이제 내가 그 이름을 내려주고 그 아름다운 경관을 기록하여 나보다 뒤에 온 사람들에게 남기노니 전날에 지나치고 뒤돌아보지 않은 자로 하여 이제 소문을 듣고 사모하게 된다면 어찌 이 바위의 행복이 아니겠는가?”
-면양행견일기(沔陽行遣日記) 의두암기(依斗巖記) 내용 중 일부 발췌

영탑사에 들르게 된다면 의두암에 올라보는 것이 어떨까. 김윤식이 걸었을 산길을 따라 계단을 오르며 이제는 의두암이라 이름 붙여진 석벽을 사심 없이 감상하는 시간을 가져본다면, 그 또한 행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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