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향 이종미(당진수필회장)

[당진신문=이종미]

연속극을 보다가 이십 년도 더 지난 이야기가 떠오른다. 소낙비 내리던 여름날, 낯선 아주머니를 열 받게 해놓고 태연하게 자리를 떴던 창의적이지만 엉뚱했던 그 아이.

웹툰 작품이 옷을 바꿔 입고 안방극장으로 들어왔다. 김새로이와 조희서가 주인공인 ‘이태원 클라쓰’다. 두 주인공의 공통점은 약자 앞에 정의롭고, 강자 앞에 절대로 무릎 꿇지 않는 소신파이다. 어떤 때는 정의가 지나쳐 소시오패스에 가깝다. 금권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아버지마저 잃은 김새로이가 길을 가던 중 어떤 아주머니한테 폭행을 당하는 조희서를 만난다. 새로이는 일단 아주머니 팔을 잡아 폭력을 말린다. 그 틈을 타고 앳되고 여린 조희서가 아주머니의 뺨을 친다. 놀란 새로이가 조희서에게 사과를 요구하자 한마디 던지면서 택시에 오른다. ‘오지랖 떨지 마라, 그 여자는 우리 아빠를 죽였다’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아이라고 생각해 이해하려는 찰라 택시 창문을 연 조희서가 외친다. ‘다 뻥이었지롱’ 

8월 한여름 어느 날이었다. 배고픈 시어머니 낮 색을 하던 오전 날씨가 점심 식사 후 보슬비를 뿌렸다. 뽀얗게 먼지 입은 나무들도 모처럼 온몸 뒤적이며 목욕하느라 분주하다. 우산도 없이 뜀박질하던 동네 꼬맹이들이 어찌나 신나서 소리를 지르던지 덩달아 흥분한 보슬비는 굵은 비를 데려왔다. 여름에 내리는 빗소리는 묘한 음률이 있어 참 좋다. 빗소리를 감상하며 유리창 너머 놀이터로 시선을 두다 깜짝 놀랄만한 장면을 발견했다. 

1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여학생을 낮익은 아주머니 한 분이 잡으려고 전력 질주를 한다. 여학생은 잡힐 듯 싶으면 놀이터 밖으로 도망쳐서 보이지 않다가 사라졌나 싶으면 다시 놀이터로 들어온다. 거리감이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아주머니가 뒤쫓는 것으로 보아 좋은 일은 아닌 듯싶다. 아이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나도 모르게 안도하다가도 다시 나타나면 불안한 것은 잘은 모르지만 아이가 잡히지 않기를 바랐나 보다. 

주룩주룩 비 내리는 텅 빈 놀이터에 아주머니 혼자 기둥처럼 서 있다. 잠시 후 마치 연극의 1막이 끝나고 다음 배우가 등장하듯 또 낮익은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들어간다. 얼마 전까지 엄마 까치와 아기까지 네 마리가 살던 소나무 아래를 지나간다. 여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소낙비를 쫄딱 맞으며 미동도 않는다. 아기가 감기 걸릴까 봐 안되겠다 싶어 수건과 우산을 챙겨 들고 나가니 아기가 구면이라는 듯 반긴다. 

그녀는 웃기는 말을 참 잘하고 흥분도 잘한다. 친절하고 부지런하지만 남의 일에 참견을 잘해 다툼도 많다. 그녀에게 잡히면 ‘누구네 아이 감기 걸렸다더라, 취직했다더라’ 부터 시작하여 ‘누가 바람났다더라, 죽었다더라’ 까지 동네 소문 다 전하지만 정작 듣는 사람 머릿속은 지진이 인다. 그녀와 마주치면 한나절이 훌쩍 간다. 그래 먼발치서 그녀가 보이면 몇 차례 숨은 적도 있다. 

빗소리와 흥분한 그녀의 목소리가 뒤섞여 들릴락 말락 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그렇다. 아기와 산책하던 중 문제의 여학생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어떤 오빠들이 돈을 빼앗아 갔다고 울먹였단다. 그 녀석이 누구냐고 묻자 눈을 들어 여기저기 찾다가 아파트 앞 슈퍼마켓을 지나는 두 남자아이를 지목했다. 

오지랖 넓은 이 아주머니는 네 살배기 자기 딸은 그 자리에 놓고 한여름 후텁지근한 공기를 가르며 달려가 두 아이를 붙잡았다. 다짜고짜 빼앗아간 돈은 어서 내놓고 사과하라고 했다. 붙잡힌 아이들이 미쳤냐고 소리 지르며 대들어 몸싸움이 일자 슈퍼마켓 아주머니가 뛰어나와 말렸단다. 아이들은 그런 적 없다고 펄펄뛰고, 슈퍼마켓 아주머니도 그런 아이들이 아니라고 증인섰다. 오지랖 넓은 아주머니가 정신을 차린 후 신고자인 여학생을 찾았다. 저 멀리 네 살배기 자기 딸만 뎅그러니 세워놓고 사라진 것이 아닌가. 두 아이한테 머리 숙여 사죄하고, 슈퍼마켓 아주머니의 끌끌 차는 혓소리를 뒤로하고 돌아서니 숨어있던 여학생이 얼굴을 내밀었다. 

‘좀 전에는 똑바로 이야기하지 않고 왜 숨었느냐고 물었다. 오빠들이랑 슈퍼마켓 아주머니랑 큰소리로 이야기할 때 소와 트럭이 부딪는 바람에 숨은 것이 아니라 피했다는 것이다. 난데없이 소와 트럭이 부딪힌 것은 무엇이며 그렇다면 아기도 데리고 피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기는 트럭 쪽에 있고 자신은 소가 있는 쪽에 있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 하자 소와 트럭이 부딪히면 누가 넘어갈 것 갔냐고 질문했다. 아주머니는 당연히 소가 넘어가지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맞아요, 아주머니는 속아 넘어간 거예요. 그리고 아까 오빠들 이야기는 죄다 뻥이었어요’ 라고 말한 후 비 오는 놀이터로 달아나버렸단다. 

그래 그 여학생을 잡겠다고 빗속에서 그 난리를 피웠다는 것이다. 다행이도 나를 만나 하소연하니 화가 좀 누그러졌다며 아기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하는 여인의 뒷모습이 소낙비를 맞는 까치네 빈둥지보다 더 쓸쓸해 뵌다. 

‘죄다 뻥이었다.’는 창의적이지만 엉뚱했던 그 여학생은 지금쯤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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