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앞 장에서 살펴 본대로 고희준의 활동은 나라를 되찾기 위한 식민지 청년의 당당한 독립운동이었지만 일제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범죄행위였다. 이에 대해 일제 조선총독부 검사 산택좌일랑(山澤佐一郞)은 고희준을 재판에 넘기면서 출판법과 보안법을 위반하였다고 활동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시하였다. “3월 2일 경성부 광화문 광장에서 군중과 같이 조선 독립만세를 불렀고, 동월 9일에는 조선은 독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취지를 기재한 독립선언서라는 제목의 문서 및 시민은 폐점을 하고 소요하지 않으면 안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고희준은 신문조서에 기록된 대로 3.1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렇게 고희준이 3.1혁명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던 요인으로 배재고보의 영향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당시 고희준은 배재고보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배재고보는 1885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기독교계 사립학교로 고종이 직접 인재를 배양하는 배재학당이라는 학교명을 지어준 것으로 유명하다. 배재고보는 1916년에 5년제 고등보통학교로 인가 받았는데 고희준이 배재고보에 입학한 것이다. 배재고보는 기독교계 학교였으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일제는 3.1혁명에 가담한 고희준을 조사하여 그 결과를 신문조서로 남겼다. 일제가 고희준을 조사하여 밝혀낸 활동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3월1일의 행적인데 고희준은 3월1일 파고다 공원에는 가지 않았지만 오전 오후 두차례에 걸쳐 “오전 10시·11시경 종로통의 종각 부근에서 50명 가량의 사람이 만세를 부르고 있었으므로 이에 가담하여 만세를 불렀고”, 오후2·3시에 광화문 앞에서 4·500명의 군중을 만나 가담하여 서대문 밖에서 불란서 영사관 앞을 지나 서소문정에서 대한문 앞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고희준은 1897년생으로 1919년 3.1혁명 당시 23살의 청년이었다. 고희준은 면천면 자개리40번지 출신이다. 고희준은 어려서 성봉으로 불렸다가 희준으로 개명하였다. 고희준은 면천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1908년까지 사립 면양학교에 다녔다. 면양학교는 1907년 9월 면천군수 박지양과 이두영, 유석록 등 면천의 유림들이 민족교육운동의 일환으로 면천 읍내리(현재 성상리)에 설립한 사립학교였다.면양학교는 1911년 면천공립보통학교가 생기면서 면천공립보통학교로 흡수되었고 학생들도 면천공립보통학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10년만에 터진 3.1혁명은 수많은 청년학생들을 각성하게 했다. 많은 청년학생들이 3.1혁명에 참여했고, 당진출신의 경성 유학생 박쾌인 또한 3.1혁명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는 나라 잃은 식민지 청년학생에게 부과된 당연한 의무로 여겼다는 뜻이고, 박쾌인을 비롯한 수많은 청년학생들이 이를 수용하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일제 당국의 입장에서는 박쾌인과 같은 부류의 청년학생들은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불온한 사상을 가진 ‘불량선인’으로 여겨졌을 뿐이다. 이에 따라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일제가 밝혀낸 학생조직의 실체는 방대했다. 경성시내의 전문대생을 비롯해 고등보통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학생조직이었다. 이들 식민지 조선의 학생들은 1919년 초 형성된 국제정세의 변화속에 조선이 독립해야 한다는 능동적인 의지를 모아냈고 조직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학생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독립의 의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독립선언과 전국적인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하였다. 이때 전면에 나섰던 것이 전문대생이었고, 전문대생들은 지방 출신으로 경성에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박쾌인이 일제에 체포된 진짜 이유는 3.1혁명의 또 다른 주역이던 학생조직 활동에 박쾌인이 경성고보를 대표하여 참가한 주동자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학생조직은 3월1일 파고다공원 독립선언식에 학생들을 동원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지만 3월5일에는 오늘날의 서울역인 남대문역 시위를 별도로 조직하였다. 3월5일 남대문역 시위는 3.1혁명 당시 경성에서 벌어진 만세시위 중 가장 대규모 시위였으며, 격렬하게 전개된 만세시위로 기록되고 있다.이렇게 대규모 시위가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벌어지게 되자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박쾌인(朴快仁)은 1898년 생으로 당진면 읍내리 54번지 출신이다. 당진면 읍내리 54번지는 현재 당진1동 사무소 주변으로 당진경찰서가 있던 곳이다. 박쾌인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 기록에 자세히 남아 있는데 3.1혁명 당시 당진에서 경성에 유학온 재경 유학생이었다. 박쾌인이 다녔던 경성고보는 구한말 설립된 관립중학교로 일제가 조선인 교육을 외면하면서 당시에는 조선인을 위한 최고의 교육기관 중 하나였다. 따라서 박쾌인은 당시 조선을 통 털어서 장래가 촉망되던 학생들만 다닌다던 경성고보에 재학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천도교도로써 이종린은 천도교 내 신구파 대립 과정에서 구파를 대표하는 종교인으로 활동하였다. 천도교 신구파의 대립과 갈등은 손병희가 투옥된 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면서 발생하였다. 손병희 사망 후 천도교는 박인호가 도통을 계승하였는데 박인호의 도통을 인정하지 않는 최린 등이 신파를 구성하면서 구파와 대립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천도교 내의 신구파 대립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우선 최린을 비롯한 신파를 친일세력으로 포섭하였다. 반면 천도교 구파는 일제에 저항하면서 멸왜기도운동을 조직하는 등 일제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조선독립신문』이 발행되어 배포되자 그 영향으로 이와 유사한 지하신문이 학생들 사이에서 만들어지고 널리 유포되었다. 당진에서 경성제일고보로 유학갔던 순성 출신의 강선필도 지하신문 제작에 자금을 제공한 것이 빌미가 되어 체포된 바 있다. 이런 지하신문 발행은 독립운동을 널리 알리고 촉발시키고자 하는데 주요한 목적이 있었다. 신문의 내용도 이에 부합하게 제작되어 일제 강점의 부당함을 역설하고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었다. 『조선독립신문』을 본 민중은 크게 고무되었고, 전국 곳곳에서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조선독립신문』은 1919년 3월1일 오전 9시에 이종린에 의해 원고가 완성되어 보성사 인쇄소에서 인쇄되었다. 이렇게 1만부가 인쇄된 『조선독립신문』은 학생들을 통해 경성시내 곳곳에 배포되었다. 『조선독립신문』이라는 제호는 이종린이 직접 지어 정한 것이고, 기사 원고 역시 모두 이종린이 작성하여 신문을 제작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든다. 이종린이 이종일에게 대중에 널리 알려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 3월1일 아침의 일이었다. 그런데 당일 아침 부탁을 받고 어떻게 잠깐 사이에 『조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이종린은 조선시대 말기인 1883년 서산 지곡면 화천리에서 태어난 언론인이자 종교인이며 정치인이었다. 이종린은 서산 지곡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정미면 승산리로 이주하여 자랐다. 지금도 승산리에는 그가 살았던 옛집이 있으며, 그 역시 승산리 산기슭에 묻혀있다.그의 옛집과 무덤이 있는 곳은 정미사거리에서 두산리 방향으로 500여미터를 가다보면 좌측에 허름하게 쓰러져가는 기와집이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이종린이 자란 옛집이다. 또한 집 뒤 얕은 산등성이에는 언뜻 보아도 범상치 않다고 느낄 정도로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이제부터 우리 고장 당진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3.1혁명 때 당진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과연 3.1혁명 때 우리 당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당진에서 전개된 3.1독립만세 운동은 어디에서 일어났고, 누가 앞장서 이끌었을까? 전국으로 확산된 3.1독립만세 시위가 충남에서 처음 일어난 것은 3월3일 예산과 대전에서였다. 이후 독립만세 시위는 충남 전역에서 벌어지게 되었는데 당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19년 3월10일에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면천읍내에서 독립만세를 부른 것이다.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이렇게 독립만세시위가 그치지 않고 계속되자 일제의 대응 방식도 점차 강화되었다. 일제가 동원한 군과 경찰은 평화적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로 진압하였다. 일제의 탄압이 얼마나 무자비했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시위 중에 총 맞아 죽었고, 체포되는 과정에서 재판도 없이 처형되었으며, 고문과 후유증으로 옥사하였는데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유관순 열사로 유명한 천안 아우내 만세시위이고,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이다. 제암리 학살사건은 단순히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벌였다는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이렇게 1919년 3월1일 식민지 조선 경성 한복판에서 시작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는 한 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당장 3월1일 경성에서의 만세시위와 때를 같이하여 평양, 안주, 진남포, 의주, 선천, 원산 등 서북지방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이렇듯 서북지방 곳곳에서 신속하게 만세시위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서북지역 기독교 장로회 활동과 관련이 깊다. 정주의 이승훈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 기독교 장로회는 3월1일 독립선언에 이승훈 등이 민족대표로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성에서 발행한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민족대표 33인의 서명자가 선정된 이후 독립선언서는 3월1일에 발표하기로 결정하였다. 독립선언서를 언제 발표할 것인가를 두고 적지 않은 고민이 있었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고종의 국상을 보기 위해 경성에 상경할 것임을 고려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고종의 국상일인 3월3일을 발표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상이 진행되는 3월3일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 불경스럽다고 비난 할 수 있다는 의견이 많아 다른 날을 선택해야 했다. 그런데 3월2일은 마침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은 기독교인들이 예배당에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천도교와 기독교가 별도로 준비하던 독립운동은 이승훈이 중앙학교 교장이던 송진우를 찾으면서 계기가 만들어졌다. 당시 중앙학교는 이른바 ‘불령선인’의 집결지였다. 중앙학교는 ‘배일사상’을 가진 사람들만이 들락날락했다는 소문이 있을 만큼 후일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명문학교이기도 하다. 이런 중앙학교에 1919년 2월 초 이승훈이 기독교계가 준비하던 독립운동 계획을 상의하기 위해 송진우를 찾았던 것이다. 기독교의 독립운동 계획은 송진우를 통해 최남선과 최린에게 전해졌고, 이를 계기로 이승훈이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파리강화회의가 열리고 윌슨 대통령이 전후처리 조건으로 14개조항을 발표하여 약소민족의 독립을 옹호한다는 소식이 국내외 언론에 보도되자 국내 인사들도 국제정세를 예의주시하게 되었다. 이후 파리강화회의를 독립의 장으로 적극 활용하고자 하는 해외 독립운동가들이 국내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독립을 위해서는 국내에서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여기에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어 알려지면서 국내인사들을 크게 자극하였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의 독립선언과 독립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파리강화회의를 독립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단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독립을 청원하는 서한을 보내 독립을 호소하는 것으로 조선이 독립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조선이 강도 일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는 독립청원을 넘어서는 좀 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구체적인 실천이란 바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는 일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상해의 독립운동가 신규식이 국내에 있는 독립운동가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弟는 이미 두 兄들
이런 국제적 상황과 흐름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처했던 인물은 상해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여운형이었다. 여운형은 일찍이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1914년 중국 남경으로 망명하여 활동하다가 1917년 상해로 활동부대를 옮겨 1918년 상해에 있던 독립운동가들과 신한청년당을 창당하고 국제정세에 조응하는 독립운동을 고민하고 있었다.이때 마침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게 되었는데, 파리강화회의를 자국의 영향력을 최대한 높이기 위한 장으로 활용하려던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을 주목하게 되었다. 미